지난 2018년 9월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체결한 ‘9·19 남북군사합의’. (왼쪽부터) 문재인 전 대통령, 송영무 전 국방부 장관, 노광철 전 북한 인민무력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뉴시스
 
지난 2018년 9월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체결한 ‘9·19 남북군사합의’. (왼쪽부터) 문재인 전 대통령, 송영무 전 국방부 장관, 노광철 전 북한 인민무력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뉴시스

북한이 2018년 9·19 남북 군사 합의 협상에서 청와대, 국방부, 주한 미군 기지 등 서울과 수도권이 포함되는 군사분계선(MDL) 이남 60㎞까지 전투기 비행 금지 구역을 설정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18일 확인됐다. 기본적 대북 정찰 비행이 제한될 뿐 아니라 수도 방위 체계도 무너뜨릴 무리한 요구였지만 당시 청와대·국방부·통일부 인사로 구성된 협상단은 이를 바로 거부하지도 않고 그대로 군에 들고 와 검토를 지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 김정은과 벌일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고 9·19 군사 합의 협상이 졸속으로 진행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국방위와 합참 전·현직 여러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은 2018년 6월 14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열린 제8차 남북 장성급 군사 회담에서 MDL 기준으로 고정익(전투기)은 군사분계선 60㎞, 무인기는 40㎞, 회전익(헬기)은 20㎞ 이내 상공을 비행 금지 구역으로 설정하는 안을 제시했다. 그해 9월 평양에서 열릴 남북 정상회담에서 군사 분야 합의물을 내놓기 위한 1차 협상 자리였다. 한국 측 협상단은 김도균 당시 국방부 대북정책관을 수석 대표로 박승기 청와대 국가안보실 행정관, 통일부·합참 과장 등 5명으로 구성됐다.

한국 대표단은 당시 협상에서 북측 제시안에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전직 국방부 관계자는 “한국 대표단은 주로 북한 대표단의 설명만 들을 뿐 비행 금지 구역과 관련해 우리 쪽 안을 제시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 대표단은 협상을 마치고 북한 안을 합참에 그대로 가져와 검토를 맡겼다. 합참은 발칵 뒤집혔다. MDL에서 평양 거리는 140㎞가 넘지만, 서울은 40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MDL 기준으로 남북으로 똑같이 60㎞ 이내 상공에서 전투기 비행을 금지해 공평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국에 크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래픽=김현국
그래픽=김현국

합참 분석 결과, 북한 안을 수용하면 우리 공군은 서울 상공은 물론 경기도 등 수도권 상당 지역에서 전투기나 정찰기도 띄우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 나왔다. 감시·정찰, 근접 항공 지원, 대화력전은 물론 각종 합동 훈련도 제한된다. 사단급 UAV(무인 항공기) 운용도 사실상 불능 상태에 빠지고, 파주 등에 있는 헬기 운용 기지의 이전도 불가피한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 대표단이 2018년 북한과 벌인 협상에서 우리 군 정찰 능력을 크게 제한하는 불리한 안을 들고 온 데 대해 합참 관계자는 “당시 군 내부에서는 한국 대표단이 왜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북한 제안을 그대로 가져왔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부 합참 실무자가 직을 거는 마음으로 이 안을 받아선 안 된다고 청와대와 협상 대표단에 보고를 올렸다”고 말했다.

한국 대표단은 한 달 뒤인 7월 중순 북측에 고정익 20㎞, 무인기·회전익 10㎞ 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북한 대표단은 버럭 화를 내며 “이런 식으로는 협상을 못 한다”면서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고정익 40㎞, 무인기 25㎞, 회전익 15㎞ 안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정부 소식통은 “한국 대표단은 북한 측에 시종일관 끌려다녔다”면서 “북측은 어떻게든 한국의 대북 방위 태세를 약화시키려고 비행 금지 구역을 더 남쪽으로 내리려 한 반면, 한국 대표단은 주목적이 협상 타결인 듯 최대한 북측에 맞추려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 대표단은 우리 원안을 고수하려는 노력은 제대로 하지 않고 북한의 2차 안을 합참에 가져와 검토시켰다.

합참은 그때도 “수도권 방어 임무에 치명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군단·사단급 UAV와 헬기 운용 폭이 대폭 줄어든다”며 반대했다. 특히 제공력은 북한이 한국에 절대적으로 열세이기 때문에 범위가 어떻게 되든 비행 금지 구역을 설정하면 북한에 유리하다. 북한은 비행 한 번당 수천만 원이 드는 전투기 운용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비행을 거의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미 군에 위협을 줄 만한 전투기·정찰기도 거의 없다.

반면 한국 공군과 주한 미군은 5세대 스텔스인 F-35A 등 첨단 전투기를 비롯해 RC-135S 코브라볼, U-2 등 각종 고성능 정찰기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정찰 비행은 북한의 7차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동향, 북 군부 통신 신호 등을 수집해 한미 군 당국이 선제 대응하는 데 필수적이다. 전직 합참 의장은 “공중에서 북한을 보는 ‘눈’과 전투기로 공격하는 ‘주먹’을 제대로 못 쓰도록 묶어버리는 군사 협상을 한 것부터 문제지만 그걸 졸속으로 진행한 것은 심각한 안보 저해 행위”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합참 작전·전략 실무자들의 거듭된 반대 의견에도 협상을 강행했다. 이에 협상 대표단은 이후 8월 3차례 협상을 더 한 끝에 2018년 9월 13일 최종 협상에서 비행 금지 구역을 고정익은 서부 20㎞·동부 40㎞, 무인기는 서부 10㎞·동부 15㎞, 회전익은 10㎞ 이내로 하기로 합의했다. 합참은 평양과 서울은 MDL 기준 거리가 3배 이상 차이 나서 비행 금지 구역 거리를 동일하게 적용하면 한국만 불리하다고 했지만, 이는 최종안에 반영되지 않았다. 비행 금지 구역도 당초 북한이 최초 제시한 안에서 크게 변하지 않고 서부와 동부로 나누어 서부 거리를 좀 더 줄이는 것으로 조정됐다. 군 내부에서는 최종안과 관련, “손발을 묶고 수도 방어를 하자는 것”이라며 비판이 나왔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그해 9월 19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군사적 긴장감을 완화할 수 있는 9·19 군사 합의가 도출됐다”고 발표하며 군에 합의안을 따르라고 지시했다.

최근 전문가들 사이에선 9·19 합의가 유명무실해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9·19 군사 합의는 지상과 해상에서도 긴장 유발 행위를 금지하기로 했는데, 북한이 2020년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일방적으로 폭파하고 지난해 12월에는 무인기 5대를 우리 영공에 침투시켰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1대는 용산 대통령실 방어를 위해 설정한 비행 금지 구역(P-73)까지 정찰하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9·19 군사 합의로 우리 군의 정찰·탐지 및 대응 역량이 약화된 사이 북한은 9·19 합의를 위반하며 군사 도발을 벌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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