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7일(현지 시각)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컨벤션 센터(JCC)에서 열린 한·중국 회담에서 리창 중국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7일(현지 시각)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컨벤션 센터(JCC)에서 열린 한·중국 회담에서 리창 중국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7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관련 정상회의가 열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리창(李强) 중국 총리와 회담을 하고 “북핵 문제가 악화할수록 한·미·일 공조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이 북한 핵·미사일 문제에 대해 성실히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해 북한 문제가 한중 관계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협력하자”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그러면서 “한중 관계는 빈번하게 만나 교류하고 대화해가면서 풀어갈 수 있다”고 했고, 리 총리는 윤 대통령의 양국 간 교류·대화 활성화 제안에 전적으로 호응했다고 대통령실이 밝혔다. 윤 대통령은 한·일·중 3국 정상회의가 최대한 빨리 한국에서 개최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했고, 리 총리는 “한중 관계는 발전해야 하고 적절한 시기 개최를 지지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과 중국 최고위급 인사의 회담은 작년 11월 시진핑 국가주석과 한중 정상회담을 한 지 10개월 만이다. 5~8일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에 중국이 시 주석 대신 리 총리를 대표로 보내면서 이날 회담이 성사됐다. 지난 3월에 취임한 리 총리는 이번이 다자 외교 데뷔 무대다.

윤 대통령은 회담에서 리 총리에게 “북핵은 우리에겐 실존의 문제”라면서 “북핵이 해결되지 않으면 한·미·일 협력 체계는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는 만큼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해달라”고 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리 총리는 윤 대통령 언급에 짤막하게 대답했다”면서 “우리가 북한 핵·미사일 문제 처리 과정에서 중국과 어떤 역할을 도모하고 싶은지 내비쳤으니 리 총리도 돌아가서 검토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외교·안보 문제는 시 주석이 결정권을 가진 만큼, 리 총리가 일단 윤 대통령 언급을 잘 이해했으며 귀국해 시 주석에 보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리 총리는 이날 회담에 대해 “솔직하면서 우호적이었다”라는 평가를 한국 측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이날 리 총리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참석한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도 “북한 핵·미사일 개발은 중대한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 위반이자 회의 참석국 모두를 타격할 수 있는 실존적 위협”이라며 중·러의 유엔 대북 제재 이행을 촉구했다. 윤 대통령은 “제재 결의 채택 당사자인 안보리 상임이사국(중·러)의 책임이 무겁다”고도 했다. 그런 만큼 리 총리와 회담에서도 윤 대통령이 “한중 관계를 발전시키려면 중국이 먼저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법을 지키고 북 핵·미사일 저지에 동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대통령실 관계자는 설명했다. 국제법과 한·미·일 공조 강화를 통해 북 핵·미사일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라고 중국을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그러면서 리 총리에게 경제와 인적 교류 등에서 양국 관계를 활성화하자는 뜻도 밝혔다. 윤 대통령은 “앞으로 고위급에서 좀 더 활발한 양국 간 교류를 희망한다”면서 “양국이 공히 다자주의와 자유 무역 질서를 지지하는 만큼 그 전제가 되는 규범 기반의 국제 질서 구축을 위해 협력하자”고 했다. 윤 대통령은 “그러면 한중 관계가 아무런 문제 없이 예측 가능성 있는 경제와 투자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한·일·중 협력체 복원 의지도 거듭 밝혔다. 윤 대통령은 전날 아세안+3(한·일·중) 정상회의에서도 “최근 한일 관계 개선을 통해 한·미·일 3국이 협력의 새 장을 열었듯 한·일·중 간에도 협력의 모멘텀을 되살려야 한다”고 했다. 연내 한·일·중 3국 정상회의 서울 개최를 통해 경색된 한중, 나아가 한·일·중 관계를 풀자는 메시지를 중국 지도부에 보낸 것이다.

윤 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지난달 미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를 통해 한·미·일 3국 협력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만큼, 한중 관계 관리에도 힘을 쏟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정부는 중국도 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9년12월 중국 청두(成都) 회의를 끝으로 중단된 한·일·중 정상 회의를 4년 만에 서울에서 개최하는 문제를 두고 한중 간에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 외교 소식통은 “윤 대통령은 중국이 북한 핵·미사일 문제 해결에 유보적인 태도를 취해 양국 관계에 걸림돌을 만들지 않는다면 협력의 길이 열려 있다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리 총리가 이번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는 별도 회담을 하지 않으면서 윤 대통령과 회담한 것은 의미 있는 메시지”라고 했다. 중국 정부도 후쿠시마 원전 오염 처리수 방류 문제로 대립하는 일본과 정상급 회담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에서 윤 대통령과 만나 한·미·일 3국 밀착에 대응해 활로를 모색하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전날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세안+3(한·일·중) 정상회의가 시작되기 전, 기시다 총리는 별도 장소에서 도시락을 먹다가 회의 참석을 위해 대기실로 들어서는 리창 총리를 발견하고 급하게 달려가 1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기시다 총리는 리 총리에게 중국의 일본산 수산물 전면 수입 금지 조치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정부는 기시다·리창 총리의 별도 회담이 여의치 않자 약식 만남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리 총리 반응에 대해 일 외무성 관계자를 인용해 “중국 쪽은 치켜든 주먹을 내릴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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