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회담 직후 트럼프에게 "김정은 1년 내 비핵화 의지"
북한 핵 폐기 이행 버티자 "왜 얘기 다르냐" 항의 불러
회담 결과 억지로 부풀리면 비핵화에도 동맹에도 해악
 

김창균 논설주간
김창균 논설주간

미·북 싱가포르 정상회담 준비 협상이 삐걱대던 지난 5월 19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하며 따지듯이 물었다. "남북 정상회담 후 나에게 전했던 내용과 북한 태도가 왜 이렇게 다르냐"는 거였다. 문 대통령은 1차 남북 정상회담 다음 날인 4월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75분간 통화했는데 그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때 불거진 문제는 미·북 정상회담이 무사히 성사되면서 가라앉는 듯했지만 후속 협상에서 북한이 비핵화 요구에 강하게 버티자 또다시 뒤탈을 내기 시작했다.

존 볼턴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은 김정은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했다는 비핵화 약속을 세 차례에 걸쳐 공개했다. 8월 5일엔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이 1년 내 비핵화를 약속했다"고 했고, 8월 21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1년 내 비핵화를 요구하자 김정은이 '예스'라고 답했다"고 했다. 9월 10일에는 "김정은이 2년 내 비핵화를 할 수 있다고 하자 문 대통령은 1년 내에 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고 김정은이 이에 대해 '예스'라고 했다"고 말했다. 남북 정상 간 대화가 오간 정황을 점점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문 대통령이 정상회담 후 우리에게 알려준 내용"이라고 토까지 달았다.

청와대는 볼턴의 거듭된 폭로성 인터뷰에 당황했다. 청와대 대변인은 "정상끼리 나눈 대화 내용은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했다. 사실상 통화 내용을 시인한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 대화 내용을 동맹국 정상과 공유했는데 그 참모가 일방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엄청난 외교적 결례다. 볼턴의 거칠고 무례하기로 악명 높은 외교 매너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볼턴은 문 대통령을 향해 남북 정상회담 결과를 과대 포장해서 전달한 책임을 지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김정은의 '1년 내, 2년 내 비핵화 발언'의 실상을 짐작하게 하는 힌트는 다른 경로를 통해 확인됐다. 9월 5일 두 번째로 평양을 다녀온 특사단은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 첫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비핵화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김정은이 비핵화 시한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방점을 꽝 찍었다. 그러나 볼턴 말을 되새겨 보면 김정은은 4·27 정상회담 때 문 대통령에게 (트럼프 대통령 첫 임기가 끝나는) 2년 내에 비핵화 의사를 이미 밝혔던 셈이다. 다만 착각해서 안 되는 것은 김정은이 북한이 일방적으로 비핵화를 해나가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사단 수석 대표인 정의용 안보실장이 밝힌 김정은의 말은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내에 미·북 적대 역사를 청산하고 미·북 관계를 개선하면서 비핵화를 실현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에 대한 안전보장과 미·북 관계 개선을 첫 임기 내에 신속하게 실행하면 거기 맞춰서 북도 비핵화 조치를 밟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지난 25년간 미·북 협상 과정에서 해온 판에 박힌 주장을 시한을 예로 들어가며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11년 전 정상회담 대화록을 다시 들춰봤다. "남측에선 (평양에) 가서 핵 문제 확실히 이야기하고 와라 주문이 많죠.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핵 문제는 이렇게 풀어간다는 수준의 그런 확인을 한번 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안 그러면 (서울에) 가 가지고 내가 해명을 많이 해야 되죠. 한 줄 들어 있으면 가서 뭐 이렇게 간다, 이렇게 될 것 같고요."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정상회담 합의문에 비핵화에 대해 한 줄만 넣어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이다. 오전, 오후 두 차례에 걸쳐 4시간 6분 동안 남북 정상이 나눈 대화 속에서 핵 문제를 본격 거론한 대목은 딱 이거 한마디였다. 김정일은 회담에서 끝내 핵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 대통령 간청대로 합의문에만 관련 문구를 한 줄 넣어줬을 뿐이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약속을 얻어내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 임하면서 "미국의 비핵화 조치 요구와 북측의 상응 조치 요구 사이에서 어떻게 접점을 찾을지 김 위원장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보고자 한다"고 했다. 이번만은 김정은으로부터 진전된 약속을 끌 어낼 수 있기를 국민 모두가 바란다. 그러나 만약 기대했던 답을 얻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국민과 동맹국에 솔직하게 설명해야 한다. 어떻게든 미·북 협상을 성사시키고 그에 따라 남북 관계 가속 페달을 밟고 싶은 욕심에 회담 결과를 분식(粉飾)하는 것은 비핵화 협상에도 동맹 관계에도 해악을 끼칠 뿐이다. 1차 정상회담 때 과오를 이번에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18/20180918040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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