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 논점은 제창이냐 합창이냐가 아니라 종북성향이냐 아니냐에 달려
이 땅의 우파와 좌파가 가진 각자의 아픔과 콤플렉스가 합창과 제창 사이에서 다퉈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작년이나 재작년 즈음 어떤 인사가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문해왔다. 나는 "노래에 무슨 주인이 있나요. 아무나 부르고 싶은 사람이 부르면 되지"라고 가볍게 답했다. 그는 "그게 아니라 국가 기념곡으로 지정해 달라는데…"라며 부연 설명했다. 나는 "노래는 말과 같아서 막을 수 없다. 국가가 노래를 정해주고 불러라 마라 하는 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답했다. 노래에 대한 내 의견은―그것이 무슨 노래이건―딱 거기까지였다.

며칠 전 광주에서 열린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으로 부르자는 측과 제창을 해야 한다는 측이 팽팽하게 맞붙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단순했는지 깨달았다. 노래를 부르는 방식이 이슈였다면 그렇게 오래 미해결로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 정도 쉬운 문제라면 누구라도 금방 풀었을 것이다. 국가보훈처장이 문전박대당하고, 참석한 총리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 옆의 정치인들은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는 이상한 그림이 부조화를 연출하는 5·18 기념식장은 각기 다른 애국심의 색깔 위에 정치권의 이해와 정권 창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하드코어 정치판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97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정부 공식 행사로 지정되면서 8년간 제창되었다. 그러다 2009년 공식 행사의 지위에서 내려와 제창 아닌 합창으로 대체되었다가 2011년 공식적 지위는 회복했으나 제창은 불허된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14년 행사에서 당시 정홍원 총리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자리에 앉아서 입을 다물고 노래를 들었으나 올해 보훈처장은 행사장에서 쫓겨났고, 총리는 노래가 합창되는 동안 자리에 일어서서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달라진 게 있다면 여소야대의 정국과 광주의 심기를 살피는 정치인이 부쩍 많아졌다는 점이다.

아마도 호소력 짙은 가사와 비장한 음률 때문이리라. '임을 위한 행진곡'의 출발은 광주였으나 영향력은 한반도 전체를 아우른다. 업종 불문 시위 현장 스피커의 단골 곡으로 흘러나오는가 하면, 운동권이 애국가를 대체하는 남조선 혁명 선동가로 부른다는 말이 돌았다. 북한에서 1991년 황석영·리춘구의 공동 집필로 만들어진 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에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고, 북한의 혁명가요집에도 실려 있다. 요약하면 노래의 위상이 정권의 노선과 맞물려 있다는 것, 그리고 종북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왜 제창은 안 되나? 제창을 하면 국가 기념곡 지정이 탄력을 받게 되고, 일단 국가 기념곡이 되면 초·중·고 음악 교과서에 실을 수 있다고 한다. 좀 앞서가는 논쟁인지는 모르나 그러면 차세대 투사 양성의 주제곡으로 자연스럽게 활용되면서 의식화 교육의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합창인가?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을 자유도 존중해야 하고, 어설프게 종북과 연결시켜 자유와 민주를 위해 투쟁한 광주의 정신을 훼손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논점은 제창이냐 합창이냐가 아니라 이 노래가 종북 성향이냐 아니냐이다. 그렇다면 노래의 성향에 대해 논쟁을 해야 하는데, 그거야 부르는 사람 마음이지 노래의 성향을 무슨 수로 가늠한단 말인가.

5·18을 상징하는 노래와 북한과의 연관성이 문제가 되면 그때부턴 복잡한 방정식이 되어 합창과 제창 사이의 좁은 거리를 놓고 다투게 된다. 무릇 이념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모든 이슈가 그렇다. 결국 이 노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상을 달리하면서 누구는 일어서고 앉고, 누구는 부르고 입 다무는 그림을 반복해서 연출할 것이다.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가 지금껏 일궈온 자유와 민주의 크기가 딱 그 정도는 아닌지, 이 땅의 우파와 좌파가 갖고 있는 각기 다른 아픔과 콤플렉스가 합창과 제창 사이 어디쯤 위치하면서 서로의 자리를 주장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당분간 그 어색함을 지켜보며 견디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리라. 뾰족한 묘안이 없어 보여 나도 어느 원로에게 자문했다. 현명한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산업화에도 희생자가 있고, 민주화에도 희생자가 있다. 희생자가 동의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산업화도, 민주화도 결코 결실을 볼 수 없다. 산업화 주도 세력은 희생자를 딛고 부강해졌지만, 민주화는 주도 세력이 오히려 희생을 당했다. 광주에서 그 많은 희생자가 나왔는데, 가해자가 그에 상응하 는 대가를 치렀는가? 가해자가 누군지는 밝혀졌는가? 누가 누구를 용서하라고 할 수 있는가. 광주의 동의 없이 이 땅에 민주화를 완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조언대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합창과 제창 문제는 좀 높은 곳에서 조망해야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차원까지 오르지 못하고 좁은 틈새에서 소모적 난타전을 벌이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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