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한명의 공대 박사와 그의 동료, 선후배들 7명은 포장마차에 모여 창업을 결심한다. 첫 작품은 영상에 자막을 띄우는 제품이었다. 때마침 노래방 붐이 일면서 단숨에 점유율 1위 업체로 올라섰다. 그들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디지털 방송 신호를 영상으로 재생하는 셋톱박스에서 가능성을 보고 뛰어들었다. 외환위기가 엄습했지만 수출에 주력해 위기를 극복했다. 이후 수출 대상국은 80개국 이상으로 늘었고, 매출액의 95% 이상이 수출에서 발생하는 중견기업으로 우뚝섰다. 창업 첫 해인 1989년 1억원 남짓했던 매출액은 2010년 1조원을 돌파했다. 대한민국 벤처 1세대의 신화, 휴맥스의 성공 스토리다.

◆ 휴맥스, 벤처 1세대의 성공 신화

휴맥스는 1990년대 벤처 붐을 주도했던 스타 벤처기업 중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곳이다. 상당수의 벤처기업은 버블에 휩쓸려 사라지거나 대기업에 인수됐다. 좋은 기술을 갖고도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위기를 자초하거나, 회계 비리와 같은 문제가 발생해 몰락한 예가 부지기수였다.

휴맥스가 순탄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셋톱박스 사업 초기였던 1997년에는 수출 대상 방송국이던 유럽의 대형 방송사가 다른 방송사로 합병되면서 졸지에 시장을 잃은 적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맞으며 CD 가라오케를 납품했던 해태전자는 도산했다. 최악의 자금난에 처하자 사업을 철수하는 게 좋다는 조언이 잇따랐다.

이 때 휴맥스는 시선을 완전히 해외로 돌렸다. '건인시스템'이라는 옛 이름을 버리고 '휴맥스'로 이름을 바꿔 유럽에 진출했다. 첫 해외법인은 북아일랜드였다. 당시 북아일랜드는 높은 실업률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외 기업의 직접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었다. 휴맥스는 이곳에 영업, 생산ㆍ조립, 서비스센터를 설립했다. 이를 계기로 글로벌 진출 전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현재 휴맥스는 80여 개국에 진출해있다. 심지어 북한에서 사용하는 셋톱박스도 휴맥스 제품이다. 휴맥스는 진출한 시장마다 현지법인을 세우는 등 철저한 현지화를 통해 세계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괄목할만한 점은 제조업자개발생산(ODM)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이 아닌 독자 브랜드로 고속 성장했다는 점이다. 변대규 휴맥스 대표는 오히려 고유 브랜드를 구축한 것이 고속 성장의 토대라고 말한다.

◆ 제2의 휴맥스를 꿈꾼다‥“해외 진출이 공통점”

제2의 휴맥스를 꿈꾸는 벤처기업 출신 중소ㆍ중견기업들도 전문화된 제품과 노하우를 전 세계에 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내수가 아닌 수출에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히든 챔피언’으로 꼽히는 고영테크놀러지는 전자기판 위에 납이 제대로 도포됐는지 확인하는 3차원 인쇄검사기(3D SPI) 부문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일반인에겐 생소한 제품이지만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등에 들어가는 칩을 정밀하게 검사하는 필수 품목이다. 해외 수출이 전체 회사 매출의 80%를 넘는다.

벤처 1세대인 남민우 벤처기업협회장이 1993년 창업한 다산네트웍스의 성공 비결도 이처럼 기업 간 거래(B2B)에서 전문화된 틈새시장을 공략한 것이다. 신호송수신장비 등 네트워크 장비와 초고속 인터넷 솔루션 분야에서 한우물을 파온 이 회사의 매출은 2005년 처음으로 1000억원을 돌파해 지난해에는 2000억원에 육박했다.

이미 해외 업체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더라도, 우수한 기술력으로 1위 업체를 바짝 추격해 세계적인 입지를 다진 기업들도 많다. 이 중 하나가 지난 2000년 창업한 메디톡스다. '보톡스'로 잘 알려진 주름 개선 약품인 보툴눔 독소를 생산하는 메디톡스는 국내 시장점유율이 2006년 8%에 불과했지만, 2009년 26%, 지난해에는 40%까지 올라서면서 2위 업체였던 디스포트와 BTXA를 제치며 1위 업체인 앨러간의 점유율에 바짝 다가섰다.

◆ 신생기업 생존률 2년 못미쳐…내수 의존 중소ㆍ중견기업 많아

그러나 모든 창업ㆍ벤처기업들이 이들 '히든 챔피언' 처럼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신생기업의 절반은 2년도 채 못 버틴다. 2006년부터 2011년 사이 우리나라 기업들의 2년간 생존율은 49.1%, 5년 생존율은 30.2%에 불과하다. 중소ㆍ중견기업으로 성장하더라도 결국 높은 내수 의존도, 글로벌 역량 부족이라는 한계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 우리나라 기업들의 생존율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2011년 기준 중소 제조기업의 총매출에서 차지하는 해외 매출 비중은 13.2%에 그치고 있다. 중소ㆍ중견기업의 수출 비중도 30%대에서 정체돼있다. 또 산업연구원이 중소ㆍ중견기업 393개사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글로벌 경쟁 기업에 비해 혁신 역량과 글로벌 역량이 모두 우위에 있는 기업의 비중은 1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혁신 역량은 기술 발굴 등 연구개발(R&D) 능력을, 글로벌 역량은 글로벌 고객 수 등 마케틱 능력을 기준으로 측정됐다.


중소·중견기업 수출·해외 매출 비중


이영주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소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낮아 기술적 우위가 약한 품목들부터 중국에 밀리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4~2008년에 우리나라의 세계 1위 수출품목의 수가 52개 줄었는데 이 중 21개 품목이 중국에 추월당했고, 20개 품목은 기술 수준이 중급 이하인 것이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전현철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R&D 투자를 기반으로 한 기술력 향상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 정부, 벤처생태계 활성화하고 맞춤형 지원으로 '강소기업' 육성해야

1990년대 후반 코스닥 시장 개설, 벤처기업 특별법 제정과 함께 벤처기업은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과도한 확장욕으로 벤처기업 본연의 일에 주력하지 않은 곳이 많았고, 때때로 정치권의 비자금 통로로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결국 벤처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켰고 이들이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업계에서는 벤처 생태계가 부활하려면 실패가 용인되는 분위기가 마련되고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 경제가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벤처기업의 자금줄인 모험자본의 공급은 크게 위축된 상황이다. 국내 벤처기업 중 99%가 정부ㆍ공공기관 등으로부터 정책자금이나 대출보증을 받는 실정이다. 경제 활력 저하로 위험 회피 성향이 강화됐고 벤처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까지 맞물리며 사회적 분위기가 모험을 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남민우 벤처기업협회 회장은 "창업 생태계는 실패가 기본이다"며 "실패에 대해 엄격히 책임을 묻고 신용 불량자라는 낙인을 찍는다면 벤처가 아닌 생계형 창업만 이뤄질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엔젤 투자나 인수합병(M&A)이 활발히 이뤄지기 위해선 각종 세제 혜택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최근 정부는 업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엔젤 투자의 소득 공제율을 대폭 높이고, 벤처기업을 팔 때 증여세를 면제하는 내용의 벤처 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아울러 벤처기업이 강소기업으로 성장하도록 정부가 나서 각종 제약을 풀어줘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현철 부회장은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올라서면 연구개발(R&D), 인력, 조세, 가업승계, 금융투자 등 각종 지원이 사라진다"며 "현재의 산업 발전법 외에 다른 법률에서의 중견기업 개념 도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부가 기업들의 단기적인 애로 요인 해소에 치중하기 보다 공격적으로 글로벌화에 나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강소기업 육성에 중요하다는 분석이다. 이영주 연구위원은 "정부의 정책이 '국내형 스타기업'을 양산하지 않도록 하려면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이 가능한 기업을 선별해 맞춤형 지원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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