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대적했던 두 가문은 2002년에도 다시 마주 보고 있다. 다만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아버지 부시에서 아들 부시로, 함께 대를 물렸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미·북 양측의 지도부도 지난 92년과 거의 다를 바 없다. 부시 부자가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미 대통령에 당선된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딕 체니 부통령은 당시 국방장관이었고,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당시 합참의장이었다. 또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론 핵심 인물로 평가되는 폴 울포위츠 현 국방 副장관은, 아버지 부시 정부에서는 국방차관으로, 91~92년 ‘북한의 핵 재처리 능력 완전 제거’ 등을 주장해 한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었다.

리처드 아미티지 현 국무부(부)장관은 한국과 일본 문제를 오래 다뤄온 경력 때문에 92년에도 비공식 자문역으로 활약했었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과, 92년 당시 국무장관을 지낸 제임스 베이커 역시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핵심 참모들도 아직 그대로다. 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대립이나, 다음해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당시 상황을 주도한 인물이 아들 김정일이었기에 그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 계속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92년 1월 뉴욕에서 아널드 캔터 미 국무차관과 사상 첫 미·북 고위급 접촉을 가진 김용순 당시 노동당 국제부장은 현재 노동당 대남비서 겸 아태평화위원장이다. 또 93~94년 미·북 회담 대표로 활약했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1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같은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박두식기자 dspark@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