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 과오, 죄악, 탐욕이 우리 정신을 차지하고 괴롭히며…/ 우릴 조종하는 끄나풀을 쥔 것은 악마인지고…. 샤를르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펼치면 만나는 첫 시다.

그의 시에는 거지, 이, 벼룩, 창녀, 독약, 뱀, 권태, 파괴, 송장 등의 단어들이 난무한다. 1857년 이 시집이 처음 나왔을 때 미풍양식을 해친다는 이유로 벌금과 함께 시 6편의 삭제 판결을 받았을 정도였다.

▶보들레르의 문학적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게 되는 것은 10여년이 지난 후였다. 『명석한 분석력과 상상력으로 인간심리의 심층을 탐구하고 고도의 비평정신을 추상적인 관능과 음악성이 넘치는 시에 결부했다』는 평가와 함께 그는 상징주의 시의 선구자로 자리매김됐다.

그는 인간 본성 속에 내재해 있는 악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 이를 역설적으로 찬미함으로써 「악의 시대」를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보들레르의 문학적 감수성에 영향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 없지만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3년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규정했다. 이는 결코 문학적 표현이 아니었다.

미국은 「악의 제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별들의 전쟁’에 나오는 우주무기를 현실화하기 위한 전략방위구상(SDI)에 착수했다.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감당할 힘이 없던 「악의 제국」은 끝내 와해를 맞게 된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어제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란·이라크와 더불어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선언했다. 인민들을 굶기면서도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을 비축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다.

미국이 규정한 「악의 축」 중에서도 북한은 맨 먼저 지목됐다.
『9·11테러 이후 (북한 등이) 꽤 조용히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진면목을 알고 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미국이 「악」으로 규정한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식견있는 지도자」 「실용주의자」라고 불렀다.

「식견있고 실용적인 지도자」가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나라가 「악의 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보들레르의 문학적 천재성으로도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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