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미간 외교적 현안 중의 하나였던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의 방미 문제가 황씨의 갑작스런 방미 포기 선언으로 전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지난 7월 미 의회 초청을 받은 후 미국에 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던 황씨가 지난 14일 미 의회관계자들에게 “지금은 미국에 갈 필요가 없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황씨의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작년 7월 이후 한·미간을 오간 뜨거운 공방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우선 황씨의 ‘변심’ 배경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될 전망이다. 97년 황씨와 함께 망명한 김덕홍씨는 ‘국정원 회유설’을 제기하고 나섰다. 김씨는 지인들에게 “방미 문제로 황씨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정원측이 고령의 황씨에게 그가 숙원사업으로 여겨온 ‘인간중심철학 개인연구소’ 건물 신축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면서 틈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황씨는 이에 대해 “북한의 핵·화학무기 문제나 인권상황 같은 이야기나 되풀이할 거면 갈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라며 “연구소 설립 흥정 운운하는 것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했다. 북한 탈출 및 한국 망명이라는 사선을 함께 넘어온 황·김 두 사람 사이는 이 일로 사실상 ‘결별’ 상태에 이르렀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황씨는 지난 연말 김씨에게 “정치는 원래 ‘동생’(김덕홍씨를 지칭)의 몫이었고 나는 들러리 아니었느냐”면서 서로 각자 갈 길을 가자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 역시 반(반)공개적으로 “북한 동포 구원을 위해 망명에 나설 당시의 지조와 양심은 어디로 갔느냐”고, 황씨를 비난하고 있다.

한편 미 국무부는 지난 10일 크리스토퍼 콕스(Cox) 공화당 정책위원장 등 하원의원 3명에게 보낸 서한에서 “황씨와 김덕홍씨가 미국 여행에 필요한 절차를 밟을 수 있게 허용하도록 한국 정부에 권유할(encourage) 것”이라고 밝혀, 황씨 방미 문제에 이전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박두식기자 dspark@chosun.com
/워싱턴=주용중특파원 midwa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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