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노동·식당일 너무 힘들어…가족 생각하며 참지요"

그날 밤 기온은 영하 7도였다. 비닐로 칸막이를 친 한 식당에서 조선족 5명이 모였다. 실내 기온은 바깥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3시간쯤 떠들고 났을 때 거의 언 몸으로 변했다. 아마 이들이 느끼는 서울의 체감 온도는 더 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날도 여전히 체포의 불안에 놓여있는 불법체류자의 신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울에 와 있는 조선족치고 불법체류가 아닌 이가 드물다”라며 얼굴이 공개되는 걸 개의치 않았다.


솔직히 중국 쪽에 가깝죠

=말투를 늘 조심하죠. 하지만 중국동포의 티를 숨길 수 없어요. 이게 드러나면 태도가 확 달라져요. 똑같은 고객인데 백화점에서 우리가 상품을 고르면 점원들이 “사지도 않을 것 보지도 말라”고 말해요.

=차라리 ‘조선족’으로 불리면 소화가 되는데, “중국 사람 아니냐”라고 할 때는 고통스러워요. 조국에 기대를 품고 온 우리를 중국사람으로 볼 때는 너무 가슴이 아파요.

=(한 참석자가 목청을 높이며) 솔직히 말하면 중국 쪽에 가깝죠. 거기서 출생하고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중국에서는 소수민족으로 살지만 한국에서만큼 홀대받지도 않아요.

=중국이 더 발전하고 잘 살았으면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지 않을 거예요. 중국에서는 조국이 그렇게 친근하게만 느껴졌는데 막상 와보니 완전히 자존심이 구겨지고 너무 실망했어요. 한국에 대해 그 좋았던 생각들이 여기 살면서 다 사라졌어요.

=한국에 오기 전만 해도 중국과 한국이 축구시합을 하면 꼭 한국을 응원했어요. 하지만 이제 바뀌었어요.

=(흥분해서) 저도 중국을 응원할 겁니다. 당장 내년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요. 하지만 1000만원쯤 되는 벌금 때문에 못 갑니다. 중국에서는 머리를 쳐들고 살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머리를 숙이고 삽니다. 남의 밑에서 절절 기면서 욕을 먹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한국사람이 세상 밖을 몰라요. 중국이 무조건 낙후하고 못 먹고 못 사는 것처럼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중국은 많이 발전하고 있어요. 조만간 한국을 뛰어 넘을 겁니다.

=비록 한국이 마음에 안 들어도 돈 벌기에는 좋은 환경이에요. 중국에서는 이렇게 벌 수가 없어요. 중국에 들어가도 또 한국으로 나올 겁니다.

=97년에 1000만원쯤 써 한국에 나왔어요. 경기도 안산의 공장에서 취업했는데 사흘 만에 오른손이 절단됐어요(그는 의수를 쳐들어보였다). 눈물 흘리며 중국으로 되돌아갔어요.

당시 황장엽(黃長燁)씨가 들어와 북한이 침략할 거라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때 심정으로는 북한군과 같이 총 들고 한국사람을 쏴 죽이고 싶었어요. 그만큼 상처를 받았죠. 그러고도 다시 들어왔으니. 작년에 산재(産災) 처리 통보를 받고 병 치료의 명목으로 들어왔어요. 집사람은 다른 루트로 지난 3월에 입국했죠.

=처음 봉제 공장에 들어갔어요. 월급이 35만원이었어요. 같이 일하는 한국 아가씨들은 다이어트한다고 조금 먹어요. 저는 일도 못 하는 주제에 밥만 축 낸다는 말을 들을까 봐 밥을 많이 못 먹었어요. 결국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어 식당으로 옮겼어요. 하루 15시간씩 일했어요.

중국에선 이처럼 힘들게 일해본 적 없어요. 두 달쯤 지내자 손가락이 썩어 피가 났어요. 돈 벌기가 너무 어렵지만 중국과 환율(換率) 차이가 있으니, 여기서 벌면 중국 가서 부자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참을 수 있었지요.

=그래도 식당 일이 좋은 편이에요. 일하면 꼬박꼬박 돈이 잘 나오지요. 공장은 돈 모으는 데는 별로예요.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막노동이 더 낫죠. 일당 8~9만원이니, 월 평균 150만원은 벌 수 있어요. 그래서 5년 만에 3000만원쯤 송금했어요.

=저는 월세방도 없어요. 사기를 당해 모아놓은 돈을 날린 바람에 월세15~20만원을 감당할 수 없어요. 지금은 친구나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아요.

=중국에 있는 남편이 실망스러울 때가 많아요. 왜 무능력한 남자를 만나 내가 이 고생을 하며 살아야 하나. 국제 전화로 가끔 부부싸움도 해요. 한국에 큰 꿈을 갖고 왔다 가정이 파괴된 동포들이 60~70%나 돼요. 자유 왕래만 된다면 이렇지는 않을 겁니다.

=여기 혼자 와서 울면서 거리를 돌아다닌 적 많아요.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외로웠어요. 그래서 교회에 다녔어요. 고독이란 것에 견디는 게 참 어려워요. 이 때문에 여기서 만난 조선족끼리 서로 눈이 맞아서 살림 차리는 이들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 이미지가 안 좋다는 걸 알아요. 그러나 술 한잔 마시다 보면 서로 의지가 돼 동거도 하지요.

=솔직히 아내가 중국에서 혼자서 집 지키며 쓸쓸히 있느니 다른 남자랑 바람 좀 났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요. 그런 핑계로 나도 바람 피울 수 있지 않을까(웃음). 이건 진심입니다.

아내가 고독하게 나만을 5년간 기다렸는데 나는 돈 부쳐준 것밖에 없어요. 가끔 전화 통화를 할 때 아내에게 “지금 옆에 다른 남자 있지?”라고 짓궂게 물어요. 전화비로 한 달에 20만원쯤 나와요. 하지만 가족의 목소리를 들어야 마음이 편해지고 다른 잡념이 덜 들어요.

=많은 사람들이 몸이 멀어지면 덩달아 정(情)도 떨어진다고 하는데, 나는 가정을 충실히 지키고 싶어요. 그게 흔들리면 다른 모든 것들이 흔들린다고 봐요.

=제가 서울에 나올 때 딸이 갓 돌을 지났어요. 문 뒤에 숨어서 자기를 찾아보라고 하는 딸 생각이 삼삼해요. 그 아이가 어떻게 변했는지 상상이 안 가요.

=91년 친척 방문으로 들어와 8개월간 일해 1000만원을 벌어 간 적 있어요. 하지만 금방 다 없어졌어요. 그래서 95년에 브로커에게 600만원을 주고 다시 나왔죠. 죽을 때까지 식당일 하며 힘들게 모아도 이곳 부자처럼 사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럼에도 아직 중국에서는 이만큼 돈을 벌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니 자꾸 한국에 나오려고 합니다. 한 번 나오면 경찰의 단속을 피해서라도 눌러앉으려는 거고 중국에 안 들어가려는 거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서울서 오래 생활하다가 들어가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적응이 안 될 거예요. 그러니 들어가기도 겁나고, 여기 있어도 불법체류 신세니까 겁이 나고. 지금까지 그 좋다는 제주도 구경을 한 적이 없어요.

=유람은커녕 길에 나가면 경찰들이 없나, 방문을 두들기면 혹시 누가 신고한 건 아닌가라는 겁부터 나요. 바깥에서 찾아온 사람이 신원을 밝힐 때까지는 쥐죽은 듯이 가만히 숨죽이고 있어요.

=자유 왕래할 수 있는 길만 열어준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되돌아가고 싶어요. 하지만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본전 생각이 나 계속 이렇게 지내는 거예요.

=송출 경비는 다 뽑았지만 지금까지 보낸 세월이 너무 아까워요. 오기로라도 더 벌어서 가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고생해 일한 대가로 자식 2명을 대학공부 시켰어요. 만약 한국에 안 나왔다면 자식을 대학 보낼 수 없었을 거예요.

이 대목에서 참석자는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군가가 건배를 제의했다.

=우리가 힘들게 돈 벌어도 인력송출 브로커에게 바치는 돈이 너무 많아요. 사실 이들 배만 부르게 했지, 자유왕래가 되면 그 쪽으로 나가는 돈을 줄일 수 있을 텐데.

=한국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는 바라지도 않아요. 자유왕래만이라도 허용해달라고 한국정부에 호소하고 싶어요. 한국에서 평생 살겠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같은 동포끼리 그런 인정도 없나요.

=재외동포법이 위헌(違憲)이라는 결정이 나와 기쁘지만, 그런데 우리는 뭡니까. 처음에는 동포가 아니라고 하다가 다시 동포로 인정한다고 하고. 두 번씩 상처를 받지 않을까 두려워요. 한국정부는 자기 자식을 내버린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합니다.

=물론 한국이란 나라가 작아 외국인들이 계속 체류하면 머리 아픈 점도 많겠죠. 우리를 강제추방시키는 것, 이해 못 하는 거 아닙니다만. 200만명 조선족 중 100만명이 한국 아니면 모두 도시로 나갔다고 들었어요.

현지에서는 중국 조선족 사회가 붕괴된다고 난리라고 해요. 자유왕래가 되면 다시 중국에 되돌아 갈 불법체류자가 많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한국으로만 몰려오면 중국에 남은 조선족이 한족에게 동화될지 몰라요. 한국에 나온 조선족이 현지에 있는 조선족을 부축해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이 자리에서 한국 사람에 대해 말을 막 했지만 솔직히 부러울 때가 많아요. 한국 사람들은 일을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해요. 그렇게 열심히 살면 세상에 못 할 일이 뭐 있겠나 싶었어요.

=저는 한국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문명(文明)을 지키는 게 가장 부러웠어요. 지하철이나 은행, 백화점에서 질서를 지키는 것을 보면 따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부모나 자식 간에 예절을 지키는 것도 인상이 깊었어요.

밤 11시쯤 이들은 진행하는 기자에게 “귀중한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며 몇 번이나 인사를 되풀이했다. 기자가 해야 할 인사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뒤 어깨를 웅크린 채 마지막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종종걸음을 재촉했다.
/진행=崔普植기자congchi@chosun.com
/陳仲彦기자jinmir@chosun.com
/윤슬기기자cupidmom@chosun.com
/사진=崔淳湖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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