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운보) 김기창(김기창) 화백이 만 스무살에 첫사랑 여인을 모델로 그린 명작 ‘정청(정청)’이 일반에 공개된다. 일본 오사카의 개인 컬렉터가 소장 중인 이 작품은 7월 5일부터 조선일보미술관과 갤러리현대에서 동시에 열리는 ‘바보예술 88년’전을 통해 한국 미술팬을 만난다.

운보의 장남 완씨는 “‘정청’은 세브란스 병원에 걸려 있다가 6·25 전쟁 때 유실됐던 작품”이라며, “92년 10월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소재불명의 한국화가 대작, 김기창씨의 정청’이란 보도를 통해 소재가 처음 알려졌다”고 말했다.

‘정청’은 작품성과 함께 영화보다 더 찡한 운보의 로맨스가 담긴 그림으로 유명하다.

32년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상심해 있던 운보의 서울 운니동 집에 모녀가 세를 들었다. 어머니는 기녀였고, 딸은 폐앓이를 하고 있어 볼이 유난히 발그레했다. 청각장애인인 운보는 폐병에 걸려 각혈을 하는 딸 이소제와 애틋한 정을 나눴다. 그녀는 밤샘작업을 한 운보의 물감통과 붓을 씻어주었고, 운보는 소제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그중 ‘여인’이란 작품이 33년 선전서 입선하자 그녀는 뛸 듯 기뻐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운보에게 소제의 폐병이 전염될까 둘이 사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34년 초봄 운보는 피를 토해 입술이 붉어진 소제와 여동생 기옥(기옥·74·현재 북한서 의사로 활동중)을 데리고 할머니 몰래 집을 나섰다. 한 의사의 응접실을 찾아 둘을 소파에 앉혔다. 귀가 들리지 않아서 그랬는지 운보는 축음기를 소도구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정청’은 그렇게 탄생했다.

‘정청’은 그해 선전서 입선했지만 운보는 그 기쁨을 결국 소제와 나누지 못했다. 발표가 나기 전 소제는 운보 집을 나갔고, 이듬해 가을 운보는 옷고름에 피를 쏟고 죽은 소녀의 소식을 전해들고 펑펑 울었다.

‘정청’이란 작품에 대해 34년 6월 8일자 조선일보 ‘미전관람’에서 손병돈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제목이 ‘정청’이라 축음기를 듣고 있는 가인(가인)이 중요점이 되어 있다. 필적이 대단히 세밀한 그림이다. ” 그러나 송씨는 기교에 있어 역작이나 물체 형상을 너무 닮게, 곱게 그리다 보니 기운이 흐르는 데는 역부족이라는 비판도 함께 적었다.

박규형 갤러리현대 디렉터는 “‘정청’은 마이니치 신문 도움으로 일본 소장가를 만나 어렵게 빌려오게 됐다”며, “인물 산수 추상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품세계를 구축한 노화가의 초기시절 역량을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청’은 이번 주말쯤 서울에 온다.

/진성호기자 shj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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