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4·27 대통령선거’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막바지 지방유세를 다니던 도중 자신의 승용차에서 내려 뒤따르던 기자단의 버스로 옮겨탔다.

그리고는 기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선거의 승리를 전망했던 기자는 김 후보에게 잘 싸웠다며 “이제 청와대에 들어가시면 국민이 실망하지 않을 훌륭한 대통령이 돼야 합니다”라고 주문했다.

그때 김 후보는 이런 대답을 했다. “나는 언젠가 통일을 논할 때 남쪽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훌륭한 대통령이 돼야 합니다. ” 상식적인 대답을 예상했던 기자에게는 뜻밖이었다.

그로부터 29년이 지난 엊그제, 당시 40대 후반의 패기발랄한 야당의 기수는 70대 후반의 노(로)대통령이 되어 ‘남쪽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 그의 일생일대의 꿈을 현실로 옮기고 왔다.

그가 북한 땅에 착륙한 전용기의 트랩 위에서 계단을 내려가기 전, 잠시 먼곳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 모습을 본 29년 전의 기자는 그가 분명 그날의 말을 되새겼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제 김 대통령은 북한 땅을 찾기 전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지게 됐다. 남북의 ‘악수’가 환상이었을 때는 누구도 책임이 없지만 그것이 현실일 때는 그것을 현실로 이끈 지도자에게 더 큰 책임을 지우는 법이다.

지금 서울의 거리는 ‘통일’로 넘쳐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통일을 여는 첫걸음’으로 선전되고 있고 사람들은 통일을 ‘보통명사’로 사용하고 있다. 통일이 민족의 지상과제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김 대통령의 방북과 정상회담 이후 통일이냐 평화적 공존이냐에 관한 분명한 선후(선후)인식이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물론 통일은 평화적 공존의 단계를 거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분명한 정립이 요구되는 것은 의례적인 수사(수사)보다 실체로서의 공존이 중요하다는 인식이며, 이것이 먼 장래의 통일에 더욱 근접하는 길이라고 본다.

‘지금 당장의 통일’은 무력에 의한 것이라면 몰라도 ‘짜깁기’로 모색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의 붕괴가 전제되지 않는 한, 남과 북 두 체제의 어설픈 반죽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체제와 정당성을 포기할 수 없고 북한이 그들의 체제를 포기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의 통일을 독일 통일에서 모델을 찾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곧 북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김 대통령은 분명 그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며 이번 정상회담의 성공도 바로 김 대통령의 그런 의지가 북쪽에 무게있게 전달됐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무력으로 남한을 붕괴시킬 수 없고 남한 내의 모순으로 남쪽 스스로 자멸하지 않는 한 공존과 상호주의를 택할 수밖에 없다. 김 대통령의 방북은 바로 그런 현실인식의 틈새를 ‘겁없이’ 파고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우리와 북한 모두에 필요한 것은 상호간섭 없는 공존이며, 한시적 분단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평양의 남북정상회담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통일로 가는 길’이라는 개념보다 공존을 평화적으로 이끌고 분단을 우호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협력으로 가는 길’이라는 인식에의 접근이다.

김 대통령의 도전은 따라서 평화적 공존과 우호적 분단이 계속 유지될 때 그 결실을 얻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북의 체제를 건드리지 않고 북도 우리의 체제를 흔드는 어떤 시도나 기도도 해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 우리 내부에서 우리 체제를 업수이 여기는 사태가 빈발해 혹시 북이 남의 자생적 실패를 기대하게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그의 ‘일생일대의 꿈’은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김 대통령이 이제 주력해야 할 것은 국민들에게 공존과 공영이 현실적 과제임을 주입시키는 일이다. 이제 문제는 ‘섭섭지 않게’ 해보낸 ‘평양’이 아니라 들떠 있는 ‘서울’이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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