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호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는 몰라도 남북 대화가 지지부진한 것까지 미국탓으로 돌리는 건 참으로 염치없는 짓이다. 그 몰염치의 극치를 보여준 게 바로 지난주에 나왔던 조선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 대변인 성명이다.

금강산 관광 사업을 ‘현 북남관계 발전의 기초로 출발점’이라고 규정한 성명은 이 사업이 파탄 지경에 이른 책임을 전적으로 미국 탓으로 돌렸다. 도대체 금강산이 미국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북한은 한술 더 떠서 현대 그룹의 와해 위기까지 ‘남한을 강점중인 미국’ 탓이라고 했다.
북한이 막무가내로 나가는 데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없을 수 없다. 자기들이 하기 싫은 것, 손해보겠다 싶은 것을 하지 않기 위한 핑계를 미국에 둘러대려는 것이다.

미국에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관계 정체 상태가 길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이 대남 관계를 전반적으로 속도조절하려는 징후는 이미 클린턴 시절부터 뚜렷했다. 북한은 6·15 선언 이후 여러 약속을 했지만, 지킨 것보다는 의도적으로 안 지킨 게 더 많다.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약속한 경의선 복원공사는 착공조차 하지 않은 상태이고, 적십자회담에서 수차례 합의한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약속도 질질 끌면서 회피해왔다. 백두산·한라산 교차 관광도 합의했지만 우리만 백두산에 갔지 그쪽에선 오지 않았고 서울에 보내겠다던 경제시찰단도 감감무소식이다. 이 모든 것이 부시 이전 시절 약속했고 실행됐어야 하나 북한이 부도냈던 일들이다.

또 진정 남북관계 정체가 부시 탓이라면 미·북관계가 악화일로이던 지난 6월 8일, 갑자기 북한이 현대와 협상에 나서 금강산관광사업 활성화에 관한 합의서에 도장을 찍은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현대가 북에 미수금 2200만달러를 주는 대신 북한은 금강산 육로관광을 허용하고, 이 지역을 관광특구로 지정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이 합의서는 이미 알려진 대로 ‘반쪽짜리’가 돼 버렸다. 남북대화의 문이 다시 열릴 것으로 잔뜩 기대한 우리 정부가 공기업인 한국관광공사를 이 사업에 참여시키고 남북협력기금에서 돈을 꺼내 북한에 미수금을 주도록 했지만 북한은 돈만 챙기고 자기들이 지켜야 할 두 가지 약속에 대해서는 입을 싹 씻어버린 것이다. 그러다 대뜸 “모든 게 미국 때문”이라고 큰소리치고 나선 게 바로 이번 아태평화위 성명이고, ‘언제든 챙길 건 챙기고 버틸 건 버틴다’는 그들 특유의 전술을 다시 한번 보여준 것이다.

북한이 막무가내로 나오는 데도 당국자들이 꿀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건 이 정부 하에서는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북한이 미국만 탓하지 아직 남한당국을 욕하는 건 아니지 않으냐”며 안도하고 인내만을 강조하는 게 우리 당국자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부 일각에서는 “미·북관계가 나빠져 남북 문제도 안 풀린다”며 북한의 ‘부시탓’ ‘미국탓’ 공세에 동조하고 편승하는 듯한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지금 북한에 대해 ‘불량국가’란 딱지를 떼어주지 않고 있지만 정작 21세기 가상적으로 꼽고 있는 것은 중국이다. 부시행정부가 미사일방어(MD)체계 구축을 서두르는 것도 중국 견제용이란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도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주 미국 뉴욕타임스지와의 인터뷰에서 미·중 관계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면서 “부시는 거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미·중) 양측은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정부가 북으로 하여금 이 정도의 실용적이고 균형있는 감각을 갖도록 재촉하지는 못할 망정, 그들의 억지 주장에 장단을 맞춰가며 대변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치부장대우 jhh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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