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통한문제연구소(NKchosun.com) 김미영기자입니다. 너무 빨리 찾아 뵙게 돼 좀 쑥스럽군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보내드린 <물증(物證)의 힘>을 읽고 한 독자분께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한국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의 고민이 아닐까 생각되어 독자께 양해를 구하고 이렇게 공개답장을 쓰게 됐습니다. 좀 사적(私的)인 얘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 독자의 편지

<<저는 남들과 똑같이 대학교에 진학하고 당시 저희 학교에서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또라이" 집단이라고 경멸시되었던 ROTC 과정을 거치어 북한괴뢰집단에 이론적으로 대항하는 정훈장교로 중대장까지 복무한 후 11년째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제는 예전같이 이데올로기가 다르면 바로 적이며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이라는 단순 냉전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평생을 반공정신에 투철히 무장되어 온 사람에게는 상당한 혼동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만 이제는 시대의 "순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군에 있는 친구들은 인제 장병들한테 북한괴뢰집단의 도발 및 침략책동이 예상된다고 훈시하면 뒤에서 낄낄대고 웃는다며 씁쓸한 웃음을 짓곤 합니다.

인제는 우리가 이러한 간단한 현실을 직시하고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바탕에 의한 상생의 법칙을 찾는데 전념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제는 대부분의 젊은 세대들은 북한에 관련된 리포트니 뭐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저희 직원들도 유심히 보면 이메일클럽에 가입하여 NK리포트를 받아보는 이들도 있지만 오는 대로 즉시 휴지통으로 사라지는 게 대부분입니다. 북한이니 뭐니 하는 뉴스에 도대체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김정일 멋있다, 쪼끄마한 나라에서 미국이랑 '맞짱'도 뜨고 하는 걸 보면..."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중략하고, 이러한 시대에 ‘NK리포트’ 같은 "성향"의 글을 독자들에게 어떤 목적으로 소개하는지, 이 글을 읽고 독자들이 무엇을 느꼈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분열되고 논쟁만 일삼는 나라 현실에 우리의 국익을 위하여 무엇이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근무시간인 관계로 성급하게 끝을 맺는 점을 사과드리며 성실한 답변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실을 보도하는 게 기자의 본분이다"라고 답을 주시진 않겠죠?">>

◇ 윤선생님께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북한에 대한 뉴스를 좀 더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조건 말고는 선생님과 똑 같은 입장에 있는 평범한 기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 답장에 담을 의견도 순전히 제 개인의 것일 뿐 편견이나 아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1989년에 대학에 입학한 소위 "89학번"입니다. 당시 어떤 뉴스매체는 제가 다니던 대학의 인문대학생중 80% 이상이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라고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89년 당시만 해도 이틀이 멀다 하고 대학의 광장에는 1만이니 2만이니 대규모 학생들이 운집해서 집회를 열고 줄지어 교문으로 나가 화염병과 돌로 경찰과 맞서며 소위 '교투(교문투쟁)'라는 것을 했고, 연일 '가투(가두투쟁)'가 있었습니다. 총학생회장의 선거는 아예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냐 주체사상이냐 하는 식의 사상 대결의 장이었고요.

이과, 문과를 불문하고 1주일에 두세 번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습을 했고, 김일성주의를 공부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좀 과잉 진지한(?) 문학도이자 촌뜨기였던 저는 그런 분위기에 속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중심'에 있는 듯한 황홀경을 느끼곤 했습니다. 무엇보다 사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금기를 깨는 쾌감같은 것이겠지요.

체제가 강하면 젊은이들의 반체제 사상에 너그럽다고 배웠습니다. 제가 입학했던 89년은 '대통령 직선'(87년)과 '서울 올림픽'(88년)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기념비적 사건 이후 경제적 풍요와 민주화 성취의 상승감으로 역대 어떤 시대보다 체제 자신감이 충천했습니다. 게다가 동구권과 소련이 맥없이 주저앉기까지 했으니까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하고 '좌익'연했던 우리 세대의 많은 대학생들이 모두 진짜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분위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안보유지'와 '경제발전'에 기여하신 분들에게도, '민주주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쓰신 분들에게도 빚만 지고 있는 세대입니다. 정말 한 일이 없이 선배 세대에게 받아먹기만 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쩌면 많은 분들께 더운 여름날 짜증스러움만 드릴 북한의 인권문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제게 반공주의자냐고 물어보시면 아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더 이상 북한을 이런 '반공'이냐 '친공'이냐의 문제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저희 선배 세대들이 '반공'의 기치로 국가를 건설하고 안보를 유지하고, 국가의 발전을 도모했던 것에는 존경심을 보내지만 이미 세계 공산주의 스스로가 패배를 인정한 이 국면에서 '반공'이라는 말은 너무 낯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은 이런 이념적 대결을 넘어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산업화니 민주화니 했던 엄중한 과제를 넘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가 '통일'이라면, 그것이 남북한 '공동체' 건설을 의미한다면, 북한의 보통사람들도 우리 만큼은 사람취급 당하며 살 수 있게 돼야 하지 않나, 살기 힘들어 남한으로 온 탈북자들도 대한민국 공동체의 일원으로 제대로 대접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이 제 취재활동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해 “쬐끄만 나라가 '미국'과 대적하니 기특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 개인적으로는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만일 가난했던 시절 우리의 앞선 지도자들이 국익을 위한 '외교'의 모든 원칙을 포기하고 김정일처럼 큰소리만 뻥뻥 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최근 취재에 따르면 북한에서 사람들이 다시 굶어죽고 있다고 합니다. 지원단체들도 많이들 지쳤다는 것입니다. 세계식량계획(WFP)이 제시하는 근본치료 요법은 북한이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권 개선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말하는 사람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인민이 죽을 고통을 당하는데 김정일에게 되레 '너 잘한다'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어깨에 힘을 준다거나, 우리가 상상을 초월하는 폭압기구로 주민을 옥죄는 독재자의 호기를 비판할 수 있는 지성조차 다 잃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 신문이 꼬집은 대로 김정일이 아직도 공산주의의 망령을 쫓아 인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 망령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군비를 증강시키고 있다면 '반공'은 두고라도 '반 공산주의 망령' 기조는 유지해야 되는 것 아닐까요. 중국은 70년대 말에 이미 여우처럼 지혜롭게 인민을 위한 정책으로 전환했고, 러시아는 보다 급진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 청산에 나섰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민을 위한 고해성사가 아닐지요.

그러나 북한체제의 위정자 김정일은 아직 고통받는 인민을 위해 울고 있지 않습니다. 북한에 대해 너무 풀어져 버린 우리의 현 세태가 미묘한 불안감을 갖다주는 이유도 바로 이 망령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한인권 이슈를 다루는 저 자신은 김정일이 진짜 인민을 위해 멸사봉공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할 때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비로소 남북한이 상생하는 기미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지요. 만일 기자로서 그런 것을 감지하게 된다면 최선을 다해 보도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아울러 북한인민들을 돕고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조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미영드림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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