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골리의 대표작 「외투」의 주인공인 말단 관리 아카키에비치는 매일 밤 마시던 차를 마시지 않고 촛불을 켜지 않고 아껴서 새 모피 외투를 사입었다. 새 옷치레를 한다고 동료들과 술을 많이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외투를 강도질 당하고 그 길로 시름시름 앓아누워 죽어간다는 줄거리다.

한대기후의 러시아 사람들 생각 속의 모피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 이 모피를 구해 동점한 것이 시베리아를 가로지른 최초의 길이라 해서 이를 「모피 로드」라 한다. 만약 모피 로드가 나있지 않았던들 칭기즈칸의 러시아 원정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모피 로드가 없었던들 한반도를 겨냥한 러시아의 집요한 남하정책도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는 효종 5년(1654)과 9년 두 차례에 걸쳐 만주 송화강을 따라 대군을 남하시켰었다. 청나라에서는 조선에다 이를 맞아 싸우게 했는데 두 차례 모두 대첩을 거두어 남하의 야욕을 좌절시켰었다.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려는 숙원은 고종황제의 러시아 공사관 파천으로 재연됐다. 인천·원산·경흥에 영사관을, 압록강 어구인 용암포에 조계(組界)를 설치, 남하 기지로 삼았다. 마산포의 율구리만에 러시아 동양함대 석탄저장소를 위한 땅을 샀고 부산 영도에도 30만평의 기지를 확보해 놓았었다.

시베리아의 모피 로드를 따라 1891년부터 놓기 시작한 횡단철도를 한반도까지 연장하고 싶었던 러시아는 의주·서울 간 철도 부설을 놓고 당시 조병식 외부대신을 통해 러시아가 시설 경비를 대고 부지만 한국측에서 대는 조건으로 로비를 진행했다. 이를 일본공사관 무관 노쓰(野津鎭武)가 알아내어 친분이 있었던 고종황제의 사촌 이재완(李載完)을 찾아가 역공작을 폈다.

시베리아 철도와 접속되면 극동침략을 가속시키는 자멸행위라 하고 일본에 넘겨주면 같은 조건으로 부설하되 황실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500만원의 차관도 제공하겠다고 꾀어 부설권이 일본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일전 북한과 러시아 간에 협정된 시베리아 철도의 한반도 접선은 한국측에서는 유럽으로부터의 물동시간을 26일에서 8일로 줄이는 일이지만 러시아측에서는 통과료 연간 4억달러 수입 이외에 그 100년 만의 좌절을 만회하고 한을 푸는 것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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