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역설」이란 게 있다. 너무 많은 정보는 오히려 관심의 빈곤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은 지금 「위기의 역설」 속을 통과하고 있다. 줄을 잇는 위기의 대열이 위기에 대한 인식과 대응능력을 감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위기의 일상화에 매몰돼버린, 결코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 한·미, 한·일 갈등의 동시출현이다. 우선 한국과 미국·일본은 전통적 맹방 또는 우방의 핵심에 자리해 있던 사이다. 한국과 미·일의 상호의존은 안보에서 경제·문화의 영역에까지 확장·심화돼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활적 맹방으로 표현됐던 국가들과 동시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정작 더 걱정하게 만드는 것은 그러나 갈등 자체만이 아니다. 국가간의 관계에서 갈등이란 미국과 캐나다, 독일과 프랑스 등 한·미, 한·일 관계보다 밀접성과 중요성이 더한 국가 사이에서도 흔한 일이다. 문제는 사태의 발생과 전개과정, 그리고 우리 정부의 온전치 못한 대처방법에 있다.

한·미 갈등의 원인인 황장엽씨 방미 허용여부만 해도 그렇다. 황씨의 연설이나 증언내용이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모순·배치될 수도 있고, 그래서 그의 방미를 후일로 미루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초청장을 가져온 미국측 인사들과 면담을 차단하는 거친 방법보다는, 정상외교채널이나 막후대화로 파문을 최소화하는 수단을 선택했어야 했다.

교과서 왜곡에서 비롯된 한·일 정면충돌도 마찬가지다. 일본을 조금만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일본 우경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고이즈미 정권 출현이 바로 교과서 문제를 예고하는 사태라고 직감했을 것이다.

「예고된 사태」에는 「예정된 대응조치」를 마련해 놓는 것이 외교역량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정부의 대처태도에서 단지 「황급한 대응」에 쫓기는 모습을 발견했을 뿐이다. 급조된 범정부적 대책기구나, 외면하다시피 해왔던 민간단체들을 동원하는 모양새가 다 그렇다.

외교적 대응수단이 작동토록 하는 데는 「결연한 의사」와 함께 「의사를 관철할 수단」이 동시에 확보돼야 한다. 이중 한 가지만 결여해도 「엄포외교」로 주저앉게 마련이다.

지금부터라도 정부는 한·미·일 갈등에 그나름대로 대응하면서도 그 갈등이 통제의 범위를 이탈하지 않도록 섬세한 외교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비용을 도외시한 외교에 불안해하는 것은 상대국가가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의 국민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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