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

최근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를 미국으로 초청하기 위해 방한한 미 의회 대표단이 당사자를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간 사건은 미국 조야에 상당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한국 정부가 왜 황씨 방미를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한국 정부는 그의 10월 방미를 위해 미국측과 협의를 하겠다고 하는 모양이지만 결과는 미지수다.

미 의회는 지난 3월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시 헬름즈 당시 상원 외교분과 위원장이 직접 황씨의 방미 문제를 타진했으며 ‘신변 안전’과 ‘본인의 자유의사’ 요건만 충족된다면 방미를 허락한다는 답변을 받았다는 점을 중요시했다.

이를 근거로 미 의회 3개 위원회 위원장 또는 부위원장과 디펜스 포럼 회장의 명의로 발급한 4장의 ‘공식 초청장’을 가지고 대표단이 한국으로 왔다. 이들은 항공권, 비자 발급 등의 구체적인 계획을 완료한 상태에서 관련 부서 및 황씨와의 접촉을 시도한 것이다. 황씨와 김덕홍씨도 7월 4일 미 의회의 초청을 수락하는 답신을 보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한때 안가(안가) 방출까지 검토한 바 있는 황씨의 미국 방문을 단지 ‘신변 안전’을 이유로 불허하고 지연하는 것은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미 의회가 황씨를 초청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의회의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미 의회는 삼권분립 정신에 따라 예산권을 쥔 입법기관이며 미국 국가정책의 기본 틀을 잡는 곳이다. 각종 위원회는 청문회나 간담회를 통해 특정 이슈에 반대하는 사람과 찬성하는 사람, 주무부서의 정부관료, 기업인, 학자 등 각계의 사람들을 초대하여 토론의 장을 마련한다. 큰 틀에서부터 세부적인 것까지 심층 토론을 벌여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법안과 예산규모를 손질하여 정책 입안을 돕는다. 따라서 대북정책 논의를 진행하면서 황씨와 같은 참고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미국은 상호주의와 검증이라는 기본 전제 하에 핵, 미사일 등의 대북협상을 앞두고 있지만, 북한의 면면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북한이 어떠한 의도로 북·미 관계나 남·북한 관계를 진행시키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북한 출신 경험자의 생생한 증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황씨는 주체사상의 실질적 창시자이며, 김정일 위원장의 스승이었고, 김일성 주석과 함께 북한을 설계한 원로다. 황씨가 구조적 차원에서 북한 사회와 지배층을 분석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황씨가 지난 8년간의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실패했다고 단언하면서 독자적인 통일전략을 설파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는 망명 직후부터 북한주민들의 의료품 및 식량지원을 제외한 일체의 대북 지원을 반대해왔다. 남북한의 격차가 ‘하늘과 땅’만큼 벌어질 때에 평화통일이 가능하다며 대북 고립·봉쇄정책을 주장해왔다.

의회의 특성상, 설사 황씨가 어떠한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참고자료일 뿐이다. 그것이 미국의 대북정책에 즉각적으로 반영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황씨의 방미 불허로 야기된 한·미 갈등은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정부가 황씨의 방미가 북·미 관계, 남·북 관계, 햇볕정책 등에 미칠 영향력을 과대 평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바람에 한·미 공조 의지를 의심하게 하고,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약속’에 대한 공신력을 실추시키고 말았다.

정부가 북한과의 통일논의를 안전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대화 못지 않게 북한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고 주변국들과 함께 지략을 모아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황씨의 방미 문제가 한·미 공조를 위협하는 사건으로 확대되어서는 안된다.
/ 세종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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