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보기 드문 초대형 ‘조문(조문) 외교 쇼’가 8일 도쿄에서 펼쳐진다. 이날 왕궁 옆 부도칸(무도관)에선 일본 내각과 자민당이 합동으로 치르는 오부치 게이조(소연혜삼) 전 총리의 공식 장례식이 열릴 예정이다.

모리 요시로(삼희랑) 총리가 장례 위원장을 맡고 아키히토(명인) 일왕을 비롯, 일본을 움직이는 1000여 인사가 참석해 3시간30분 동안 거국적으로 거행된다. ‘서민 재상’으로 인기 높았던 고인을 보내는 최후의 의식. 그러나 장례식 자체보다 그 뒷 무대에서 각국 정상이 전개할 막후 외교전에 세계의 이목이 더 집중되고 있다.

조문 사절단 파견 규모만 보면 90여개 국가·국제기구가 조문하는 이번 도쿄 무대는 50여개국 대표가 참석했던 요르단의 전례를 능가한다. 정상급으로는 김대중(김대중) 대통령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비롯, 16개국 대통령 또는 총리의 참석이 예정돼있다. 6일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을 필두로,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 추안 태국총리, 훈센 캄보디아 총리, 하워드 호주 총리 등 아시아·태평양 주요국 정상이 속속 도쿄에 입성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부총리급을 파견했다.

그러나 천수이볜(진수편) 타이완 총통이 대리로 보내려던 장쥔슝(장준웅) 총통부 비서장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일본 정부에 의해 비자 발급이 거부당했다. 국제 정치의 냉혹한 힘의 논리는 장례식에도 어김 없다.

모리 일본 총리는 7일 첸치천(전기침) 중국 부총리 등과의 면담으로 조문 외교 레이스의 테이프를 끊었다.

모리 총리는 9일까지 3일간 14개국 대표와 10~30분 단위의 짤막한 회담을 연쇄적으로 가질 예정이다. 사이가 벌어진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하워드 호주 총리도 동티모르 사태 이후 처음으로 8일 만나 화해를 모색한다.

조문 외교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한·미·일 3국간 연쇄 회담. 북한 문제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는 한·미·일로선 다음주 남북한 정상 회담을 앞두고 입장 조율을 벌일 절호의 타이밍이기도 하다. 8일 장례식 전엔 미·일과 한·일이, 장례식 후엔 한·미 정상이 각각 양자 회담을 갖고 3국 공조를 과시할 계획이다.

당초 김 대통령은 불참할 생각이었으나 ‘일본 중시 자세를 어필하기 위해’(정부 당국자) 당일치기 참석으로 계획을 바꿨다. 다만 김대중·클린턴 대통령이 15분 만나는 등 회담 시간이 절대 부족해 실질적 논의가 이뤄지긴 힘들 전망이다.

/동경=박정훈기자 j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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