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고 있는 탈북자들. 그러나 이들을 중국에 도착한 순간부터 다시 처절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


장길수 가족의 예에서 보듯,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한국으로 오는 과정은 또 한번 사선을 넘어야 하는 처절한 행로다. 수십만 탈북자중 그래도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행운아’들의 체험을 소개한다./편집자

김인철 (가명ㆍ48)

97년 7월 아내와 아들 딸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북한에 있을 때 보위부계통에 있어서 북한의 추격이 바로 따라 붙었다. 러시아로 가면 한국행이 쉽다고 해 흑룡강에서 러시아 국경을 넘다가 중국공안에 체포됐다.

주변에서 체포된 북한인 남자 5명과 여자3명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되던 중 가족을 데리고 다시 탈출했다. 그러자 중국 공안에서는 나를 중국돈 1만 위안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한달만에 다시 아내와 함께 체포됐다. 아들은 미성년자라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 끌려가면 끝장이라 생각하고 공안국 2층에서 뛰어내렸다. 아내는 구해내지 못하고 북한으로 송환됐다. 여기서 헤어진 딸은 중국브로커에 걸려 내륙지방으로 팔려갔다.

그 이후 교회에서 여비를 조금 얻어 북경, 상해, 홍콩 등지의 한국공관을 찾았지만 문전박대 당했다. 상해 한국 영사관에서 만난 탈북자와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중국 운남성에서 미얀마, 라오스를 거쳐 태국까지 3개월간 걷고 또 걸었다. 여기서도 몇번이나 감옥에 갇혔지만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도망쳤다. 먹지도 못하고 산열매를 뜯어먹으며 굶기를 밥먹듯 했다.

마침내 태국에 들어가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들어갔다. 그동안 같이 왔던 박송학은 감옥에서 위가 터져 죽고 말았다. 너무 굶다가 먹을 것이 들어가니 탈이 생긴 것이다. 그의 시체를 안고 한없이 울었다. 며칠만 살았어도 함께 한국에 왔을 친구였다. 네 식구중 이렇게 해서 나와 아들만이 한국에 들어왔다.

김은철 (31)

1997년 3월 쪽배로 압록강을 건너 탈출했다. 조선족 교포의 도움으로 한국인 회사에서 일하다 IMF로 부도가 나 북경의 어느 식당에서 일하게 됐다. 하지만 사장은 여권을 마련해 준다면서 월급을 주지 않았다. 밀린 월급이 3000 위안이 됐을 무렵 그 식당도 문을 닫게됐다. 월급을 받기 위해 도망간 사람을 찾아 러시아 국경까지 갔지만 허사였다.

중국친구의 도움으로 천진, 대련 위해 등 가보지 않은 도시가 없었다. 술집에서 일하는 북한아가씨에게 용돈을 얻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먹고 중국남쪽 해남도까지 내려가게 됐다. 중국땅을 벗어나 미얀마까지만 가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중국에서 미얀마로 가는 길은 험한 산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더 많았다. 석달 보름동안 집 구경은 해보지도 못했다. 동네에서 빌어먹거나 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버텼다. 비가 오면 나무에 몸을 피했다. 하루에 백리씩 걷고 또 걸었다.

가끔 경찰에 붙들리기도 했는데 벙어리 흉내를 내니 마구 때렸다. 죽을 힘을 다해 몇 번이고 도망쳤다. 강을 건너다 물에 휩쓸려 죽을 뻔도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하고 싶었다. 청바지가 다 찢어졌고 머리를 깍지 못해 산적처럼 돼 버렸다. 결국 미얀마에 도착해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찾았다. 식당주인이 한국대사관에 연락해 한국에 올 수있었다.

이철진 (가명ㆍ26)

97년 4월 한국방송을 듣고 서방비디오를 보다가 보위부의 추적을 받고 탈출했다. 두만강을 건너 장백현의 조선족 집에 들려 무작정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은 딱한 내 사정을 외면할 수 없어 이틀간 숙식을 제공했지만 북한측의 보복이 두려워 중국돈 100위안을 주면서 나를 떼밀었다. 그것을 가지고 연길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10여 시간의 긴 여정은 불안과 초조의 연속이었다.

연길서 한국업체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때 한 조선족 청년을 알게 됐다. 그의 소개로 한 한국사람을 소개받았지만 돈벌이에 도움 안되는 탈북자를 당장 내쫓으라고 호통쳤다.

그 조선족청년의 도움으로 중국정착을 시작했다. 공안당국이 단속을 할 때는 산 속의 절에 숨기도 했고 비를 맞으며 거리를 밤새 방황한 적도 있었다. 한국행을 수소문하기 위해 대련, 천진 등을 전전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이때 두 번째 은인을 만났다. 바로 길수가족을 도와준 그 분이었다. 한국의 인권단체와 중국의 조선족들이 성금을 모아 나의 탈출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6만 위안으로 한국으로 가는 여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탈북해서 2년 만에 이루어진 한국행이었다.

이유일 (가명ㆍ 26)

98년 7월 일가족 9명이 두만강 상류의 물살이 약한 지점에서 강을 건넜다. 중국 땅에 닿으니 회령에서 거주하면서 중국 상인에게 미리 부탁해 마련한 승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승합차를 타고 용정으로 가 그 곳에서 기차로 하얼빈으로 이동했다. 하얼빈에선 마음씨 좋은 조선족을 만나 약 1년 간 숨어 지내면서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 사이 베이징 한국 대사관에 가서 한국행을 도와달라고 하니 대사관측에선 한ㆍ중 관계 상 어렵다면서 중국돈 700위안을 주면서 딴 데 알아보라고 했다. 베이징에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을 찾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어디에 있는지를 찾지 못해 하얼빈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갖은 방법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바람에 숨어지낼 수 있게 도와주던 조선족에게서 한국에 들어가 정착금을 받으면 갚겠다는 조건으로 5000 달러를 빌렸다. 이 돈으로 중국 여권을 만드는 데 성공해 한국에 입국하게 됐다. 믿고 도와 준 그 조선족이 아니었으면 한국으로의 망명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민정 (가명ㆍ23)

부모님과 나, 단촐한 세 식구인 우리는 함께 탈북했다. 조선땅이라면 북이나 남이나 밟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중국에서 정착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적없는 생활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조선족들은 북한사람이라면 내놓고 멸시한다. 친척들도 고운 시선이 아니었다. 지적 수준으로 봐도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우리 북한사람들이 가난때문에 인간 이하로 멸시받는 것이 싫었다.

게다가 아슬아슬하게 체포위기가 닥쳐오곤 했다. 북한 보위부원이든 중국 공안원이든 우리를 표적으로 삼으니 불안한 생활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행을 결심했다. 99년 당시만 해도 언론이 탈북자 수기를 많이 실어주고, 한국으로 가는 길도 많이 열어주었다. 우리는 어머니가 한국의 한 월간지에 글을 보내기로 했다. 긴 글을 쓰자니 종이가 없어 내가 연길 시내 노래방에서 돈을 벌어다 어머니에게 종이와 펜을 대고, 또 일을 해 우표값을 벌어오는 식이었다. 행운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한국에서 어머니의 글이 나간 후 도움의 손길이 왔다.

/정리=강철환ㆍ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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