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사냥꾼에 쫓긴 사슴을 숨겨주듯 곤궁에 처해 도망온 사람들은 인도적으로 감싸주는 것이 법도였다. 외래 성씨의 시조들 가운데에는 이렇게 포용된 외국 난민들이 많다.

이를테면 여(呂)씨의 시조는 본래 중국 내주(萊州) 사람으로 당나라 희종(僖宗) 때 그 유명한 황소(黃巢)의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난민이다. 사공(司空)씨도 같은 무렵 역시 황소의 난을 피해 동래한 난민으로 고령에 정착하여 후손을 퍼뜨렸다.

임천 조(趙)씨의 시조는 송(宋)나라 태조의 둘째 왕자 후손으로 난을 피해온 난민으로, 고려 왕실에서는 하림군에 봉해 우대하고 임천에 식읍을 주어 정착시켰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함종 어(魚)씨 시조는 중국 빙익부(憑翊府) 사람으로 남송 때 난을 피해 동래한 난민이요, 황주 변(邊)씨 시조도 벼슬하고 있던 송나라가 망하자 보트피플이 되어 서해를 건너 황주에 정착했다.

보트피플로는 월남 이씨왕조(李氏王朝)의 왕자를 들 수 있다. 외척인 진수도(陳守度)가 무력 무능한 왕을 속여 일곱 살 난 왕녀와 자기 아들을 결혼시키고 쿠데타를 일으켜 진씨 왕조를 세운다.

이때 이씨 왕족을 몰살했는데 유일하게 이에서 빠져 보트피플이 되어 옹진반도에 표착한 난민이 마지막 임금의 숙부였다. 이에 고려 왕조에서는 군에 봉하고 화산에 식읍을 주어 정착시키고 화산 이씨 시조로 후손을 퍼뜨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복고혁명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한국에 망명한 명나라 구의사(九義士)도 한국인의 인도적 품에 포용되고 그 정개를 높이 우러렀던 난민들이다. 왕미승·빙삼사·황공·정선갑·양길복·왕이문·배삼생·왕문상·유한산 등의 난민들은 가평 조종현에 집단거주하면서 후손 외손들이 피를 나누며 난민인맥을 훌륭하게 형성시켜 내렸던 것이다.

이미 국제협약에 의해 난민의 지위를 정하기 이전에 우리 조상들은 정치적 압력이나 보복과는 아랑곳없이 인도 인권 차원에서 이처럼 난민을 수용했었다. 지금 우리와 핏줄을 더불어 한 탈북난민 장길수네 가족이 세계의 양심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다.

대명천지에 국가나 정치·종교를 초월한 유엔이 하는 일인지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 조상들이 했던 만큼만 이들에게 베풂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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