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탈출한 납북 어부 이재근(이재근·62)씨는 북한 당국이 봉산21·22호 납북 어부들을 6개월간 신변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머리 회전이 빠르고 신체 건강하며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는 사람들을 회유·협박해 억류시켰다고 폭로했다.

이씨는 “나를 비롯한 7명의 어부들은 1970년 11월15일, 대남 적화통일을 위한 간첩 양성기관인 중앙당 정치학교에 입교해 2년6개월간 사격, 폭파, 요인암살, 침투, 무전, 수영, 격술 등 특수훈련을 받았다”고 밝혔다.

졸업 후 이씨는 사상 성향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대남공작부서로 가지 못하고 함남 함주군 선박전동기공장에 배치돼 25년간 일반 노동자로 근무했다. 함께 입교했던 동료들은 대남연락소 지도원, 간첩 안내원, 중앙당 정치학교 남조선어 교관 등 대남공작 관련 부서에 근무했다고 전했다.

그는 1981년과 85년 두 차례 원산연락소에서 납북어부들을 대상으로 한 재강습을 받았는데, 이때 100여명의 납북어부들과 3개월간 함께 생활하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씨는 이 중 이름과 인상착의를 기억하는 25명(그 중 3명 사망)과 정부의 납북 억류자 현황에 포함되지 않은 7명(그 중 1명 사망) 등 32명의 납북어부 인적 사항을 공개했다.

이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탄광이나 광산, 기계공장이나 농장 등 최하층 노동자로 배치돼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식량난이 심화되면서 납북어부 김장원(함북 함흥시 사포2동 거주·흥남비료연합기업소 기계기사)씨 일가 7명은 1997년 아들 하나를 제외한 여섯 식구가 굶어죽었다고 증언했다. 정부의 납북 억류자 현황에는 김씨가 1965년 11월 20일 명덕호를 타다 납북 당했으며(당시 16세) 강원 속초가 고향으로 기록돼 있다. 우리 정부의 납북 억류자 현황에 포함되지 않은 납북어부 5명은 소형 어선을 타고 나갔다가 납북된 사람들이다.

이씨는 납북 전 서울에서 동거생활을 하며 아들(김종목)을 두었다. 이씨는 “동거녀가 사망하는 바람에 4개월 된 아들을 서울 성동구 신당동 김학룡씨 집 앞에 버리고 군에 입대했다”며 “귀국하면 아들을 찾아 속죄하고 싶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울산시에 살고있는 이씨의 형 재원(재원·울산시 달동)씨는 “동생이 죽은 것으로 알고 10년 전부터 제사를 지냈는데, 곧 고향에 돌아온다니 꿈만 같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조선족을 통해 북에 억류중인 동생 이씨의 생존사실을 알았으며 동생의 탈북과 제3국에서의 은신생활을 위해 금전적 도움을 주었다. 재원씨는 “동생은 우리 공관에 수 차례 귀국요청을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아 만리타향에서 떠돌다 죽는 줄 알았다”면서 “동생이 납북된 후 30년 동안 정부로부터 어떤 위로의 말이나 편지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울산에는 동생 재봉(재봉)씨, 누나 흥순(흥순)씨가 살고 있다.

/김용삼 월간조선기자 yskim@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