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시절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 전 의원은 최근 ‘팔십 노구 DJ가 방북하는 다섯 가지 이유’란 글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인데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면 우선 그의 답방(答訪)을 요구하고, 그것이 안 되면 제주도나 개성, 도라산역에서라도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야 한다고 설득하고, 그것까지 여의치 않을 경우 평양에서라도 회담을 하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

정상회담 연연 안해

김 전 대통령의 생각이 이와 똑같은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는 6월 방북시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 나서라고 요구할 가능성은 크다. 한때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DJ 방북 이후 노무현·김정일 회담이 열리고 그 자리에서 남북 연방제 논의까지 이뤄질지 모른다는 우려 섞인 시나리오가 나돌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남쪽의 남북연합제와 북쪽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통합해 통일의 1단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장 전 의원도 김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가면 “통일헌법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의중을 타진할 것”이라고 했다. “남북연방제 문제를 현실화시키기에는 상황이 성숙되어 있지 않지만, 통일에 대한 초석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이 부분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도 같은 생각일까. 최근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DJ의 6월 방북에 합의하고 통일부가 DJ방북을 실무 지원하는 것을 보면, 양측간에 상당한 협조가 이뤄지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이종석 통일부장관도 3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김 전 대통령이 북의 6자회담 복귀 등을 합의해오면 적극적으로 정부 합의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장관이 DJ방북에 기대를 드러낸 것은 6자회담 한 대목뿐이다. 그는 남북연합 등의 논의에 대해서는 “현 정부는 (남북)통합 문제를 정책 틀 내에서 갖고 있지 않다.

김 전 대통령도 그런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합의나 논의를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드러운 표현이지만, 김 전 대통령이 그런 논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명확히 밝힌 셈이다. 그는 또 2차 남북정상회담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았다.

연방제 논의는 안돼

그는 한 달 반 전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총동창회 초청 모임에서는 “북한이 지방선거나 대선을 앞두고 정상회담을 제안할 가능성은 없고, (회담을) 한다면 차기 대통령과 하려 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북한이 노 대통령 임기 중 정상회담을 하려 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말이지만, 그런 판단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그런 북한을 억지로라도 회담장에 끌어들이기 위해 정부 차원의 특별한 노력을 할 뜻도, 계획도 없다는 얘기도 된다.

전직 대통령이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현직 대통령은 없다. 그것이 권력세계의 속성이다. 게다가 북한을 바라보는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온도차는 적지 않다.

노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3년 3월 14일 대선 공신인 김원기, 정대철, 이낙연 의원이 청와대를 찾았다. 한나라당이 주도한 대북 불법 송금사건 특검법안에 대해 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달라고 건의하기 위해서였다.

노 대통령은 이들의 얘기를 말없이 듣기만 하고는 국무회의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고, 곧바로 국무회의에서 특검법안이 원안 그대로 공포됐다는 소식이 의원들 귀에 전해졌다. 이들 의원들은 그날 밤 통음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직후 김 전 대통령을 예방했을 때에도 대북 불법 송금이 사실인지 여부를 직접 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특검법안은 노 대통령과 DJ 진영의 정치적 갈등을 낳은 뿌리였고, 뒤이은 민주당 분당으로 그 갈등은 폭발했다.

노 대통령은 줄곧 김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칭송하고 그 정책을 승계한다고 말해왔다. 노 대통령이 대북포용정책을 이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북정책을 국정의 최우선순위에 두고 자신의 대북정책을 성사시키기 위해 국력을 동원했던 김 전 대통령과 노 대통령은 다르다고 참모들은 말한다.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으로부터 ‘남북연합’이니 ‘연방’이니 하는 얘기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서 “노 대통령은 현 단계에서의 남북관계는 평화적으로 잘 관리해나가는 것이 우선이지 남북을 엮기 위해 무리하게 인위적인 수단을 쓸 때가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종석 장관이 ‘남북 통합 문제는 정책 틀 내에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은 바로 노 대통령의 이 같은 생각 때문이란 것이다. 이 관계자는 또 “무엇보다도 노 대통령은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보다는 정부혁신과 지방분권 같은 내정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北 6자회담 복귀엔 기대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통일부장관일 때도 노 대통령은 종종 정 의장과 의견을 달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예컨대 정 의장이 개성공단을 빨리 활성화하기 위해 입주할 기업들에 특혜를 주자는 의견을 내면 “그러면 안 된다”고 제동을 걸었다고 한다. 그래도 정 의장이 자신의 주장을 계속하고 논란이 길어지면 노 대통령은 “무슨 얘기인 줄 아니까 이 정도에서 그만 합시다”라고 잘라버리곤 했다는 것이다.

현 정부 외교안보분야의 핵심에서 일했던 한 전직 고위인사는 “노 대통령은 미국 중심으로 가자는 주장을 체질적으로 싫어하지만, ‘북한’ ‘북한’ 하는 사람들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면서 “노 대통령이 김정일과의 회담에 적극 나서지 않는 것도 이런 인식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그동안 언제든지 남북정상회담을 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히면서도 그 필요성이나 가능성에 대해 무게를 실어 언급한 적은 한번도 없다. 가장 중요한 현안인 북핵 문제는 남북정상회담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란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 참모들의 설명이다.

그렇다고 노무현 정부가 DJ방북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DJ방북이 궁지에 몰린 북한으로 하여금 6자회담 복귀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홍준호 선임기자 jhh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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