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82년이었다. 대학생들은 1980년의 뜨거운 민주화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민주화에 실패하고 군부에 다시 권력을 넘겨주었다는 생각에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불덩이를 감추고 있었다. 내가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대학은 조용했다.

시위가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시위가 시작되면 30초 안에 시위대에 비해 2~3배나 많은 수의 사복경찰관들이 서울대 캠퍼스 어디선가에서 튀어나와 시위를 진압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울분과 분노를 마음속에 쌓아갔다.

우리가 대학 다닐 때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아마 ‘5월의 노래’였을 것이다. 그 ‘5월의 노래’는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라는 매우 선동적인 후렴구를 갖고 있다. 지금 들으면 약간 섬뜩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 우리는 이 노래가 우리의 정서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고 생각해서 부르고 또 불렀다.

이 노래처럼 당시의 학생운동은 날이 갈수록 과격해졌다. 투쟁방식도 처음에는 가끔 돌을 던지는 정도였으나 점차 화염병과 각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론적으로도 처음에는 뉴레프트이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수용하는 데로까지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내가 쓴 글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제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민주화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경제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졌다. 세계도 급속히 변했다.

그리고 우리도 변화했다. 우리는 90년대에 들어와 한국의 민주화와 산업발전을 무조건적으로 폄하하는 활동에 대해 점차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해외를 다녀보니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에 대해 경탄하는 외국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외국과 비교해 봐도 우리나라가 그렇게 뒤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회운동가들이 한국 사회와 한국의 근·현대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들이 바로 뉴라이트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90년대 중반 북한 발 뉴스가 집중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수백만 명이 기아로 굶어 죽고 있다는 이야기, 정치범수용소의 극단적인 인권유린, 사회 곳곳에서의 인권유린, 극심한 불평등, 김정일의 각종 비리와 권력남용 등이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교차확인되었다. 우리는 이때 다시 한 번 피가 솟구쳐 올랐다.

우리는 처음에는 좌파에 더 많이 기대했다. 평소에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해왔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외쳐왔기 때문에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된다면 북한인권운동에 적극 나설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좌파로서 북한인권운동에 나선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북한인권운동은커녕 북한의 실상을 아는 것조차 기피했다. 우리가 설명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쉬운 길이 있으니 직접 확인해보라고 해도 이를 귀찮아하거나 의도적으로 기피해서 실제로 확인해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뿌리에서부터 송두리째 부인당하고 있다는데 이에 관심도 갖지 않고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인권이요 인간의 존엄성이요 하고 떠드는 사람들의 위선과 이중성에 다시 한 번 더 피가 솟구쳐 올랐다.

이들은 지금 이런저런 위치에서 한국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다. 북한인권운동과 함께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사상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통절히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때 주사파의 ‘강철’로 하여금 뉴라이트운동에 뛰어들게 만들고 지난주에 출범한 뉴라이트재단에 적극 참여하게 된 이유이다.

내 앞에 놓인 시대적 과제가 80년대 당시 군사정권을 타도하는 일 못지않게 만만찮음을 잘 알기에, 더불어 한때 내가 저질렀던 사상적 오류를 말끔히 씻어내기 위해 새삼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결의를 다지는 5월이다. /김영환 · 뉴라이트재단 기관지 '시대정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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