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탈북소녀 김한미양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앉았던 자리는 원래 부통령이 앉는 곳이다. 부시 대통령은 자기 오른쪽 그 부통령 자리에다 한미양을 번쩍 들어다 앉혀놓았다.

이 천진난만한 여섯 살 아이는 온갖 장난을 쳤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에 납치된 요코다 메구미의 어머니가 준 책을 펴자 거기에 끼어들어 이리저리 책갈피를 젖혔고 부시 대통령 귀에다 입을 대고 “I love you(사랑해요)”라고 속삭였다.

부시는 그런 한미양을 보며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즐거워했다. 한미양이 그린 자신의 얼굴그림을 오른쪽 탁자 위에 세워두고선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말했다.

40여 분간의 만남이 끝난 뒤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집무실로 불러들여 즉석 기자회견을 열었다. “나는 오늘 이곳 집무실에서 대통령이 된 이래 가장 감동적인 만남 중 하나를 가졌다”로 시작되는 발표는 사전 준비된 원고도 없었지만 부시 대통령이 근래에 한 여러 언급 중 가장 심정에 와 닿는 것이란 평가를 받았다.

“세계는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과 맞서 싸울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 담긴 이날 언급은 백악관이 곧 전문을 녹취해 배포했고 인권운동가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부시 대통령의 발언 전문은 블로그 heo.chosun.com 참조). 그 자리에 배석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북한인권특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등 미국의 한반도 정책 최고 수뇌들이 어떻게 대통령의 의지를 읽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미양의 백악관 면담이 끝나는 시각, 연방의사당 앞에서는 200여명이 ‘북한자유의 날’ 집회를 갖고 있었다. 몇 년째 이어지는 행사이지만 올해는 일본 피랍자 가족과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함께 북한인권상황을 규탄하고 관심을 호소한 점이 달랐다.

참석자들은 검은색 천으로 된 완장을 차고 있었는데 거기엔 “침묵은 북한인들에게 죽음(Silence is Death for North Koreans)”라고 쓰여 있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이름이 끊임없이 거명되고 “당신의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Your days are numbered)”라는 말이 몇 번씩 이어졌다. 북한인권 실상을 전하는 전단과 호소문을 읽으며 많은 이들이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간 워싱턴에서 열려온 ‘북한자유주간’ 행사는 이것으로 끝을 맺었다. 기자의 미국인 친구가 때마침 우연히 탈북자들의 북한탈출과 한국 행을 그린 다큐멘터리 ‘서울 트레인(Seoul Train)’을 보고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남북전쟁 당시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흑인들의 행로를 ‘솔 트레인(Soul Train)’이라고 부르는데, 이와 발음이 거의 같은 ‘서울 트레인’ 영화는 미국 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교회와 대학, 작은 모임들에서 상영되었고 사람들을 울렸다. 그렇게 북한인권 문제는 지난 몇 년 간 널리 퍼져나갔다.

이젠 미국인들도 웬만한 사람이면 북한의 강제수용소나 대량 국외탈출, 기아, 공개처형 같은 인권 실상을 알고 있다. 북한의 인권상황에 침묵해선 안 된다는 공감대는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그 공감대가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미 의회의 북한인권법 제정, 부시 대통령의 대북경고를 낳는 근본적 힘이다. 북한지도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선 인권문제에도 침묵해야 한다는 논리는 갈수록 세계사회에서 이상하게 비치고 있다./허용범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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