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哲煥 정치부 기자·1992년 탈북

11일 밤 80세를 일기로 작고한신상옥(申相玉) 감독의 소식을 북한 주민들이 안다면 남한 사람들 못지않게 애도할 것이다. 신 감독은 북한 인민에게도 지울 수 없는 추억과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197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홍콩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후 신 감독은 부인 최은희 여사와 함께 1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북한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였다.

신 감독이 만든 ‘철길을 따라 천만리’라는 영화에서, 우산으로 가리기는 했지만 남녀가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북한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남녀의 자유로운 사랑은 북한 주민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당시 주민들 사이에서는 온통 ‘신필름’ 영화 이야기가 화제였다. 신 감독이 언제 또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에 관심이 쏠렸다.

신 감독은 배우 선택도 북한의 고전적인 미인형(사과형)에서 서구적 미인형(계란형)으로 바꾸었다. 신 감독은 스튜어디스행장에서 장선희를 ‘사랑 사랑 내 사랑’(춘향전을 소재로 한 영화)의 주인공으로 발탁해 스타로 만들었다.

‘홍길동’의 주인공 이영호 역시 신 감독이 만들어낸 스타였다. ‘붉은 날개’ ‘소금’ ‘광주는 부른다’ ‘불가사리’ ‘은비녀’ 등 신 감독이 만든 모든 영화는 북한 주민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의 작품들은 가급적 사상성을 배제하고 사람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이런 파격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은 김정일이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 신 감독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장군님이 그토록 사랑을 베풀었는데 배반하다니? 영문을 모르는 북한 사람들은 왜 신 감독이 최고지도자가 밀어주는 엄청난 특권을 버리고 도망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영화를 볼 수 없게 된 북한 주민들은 “이제 무슨 재미로 사나” 하며 허탈해했다. 그러나 자유를 경험했던 북송 재일교포들이나 납북자들은 신 감독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신 감독이 만들었던 ‘신필름’은 해체됐고, 그와 함께 일했던 배우와 감독, 스태프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됐다.

몇 년 전 한국서 신 감독을 만났다. 그는 내가 쓴 책 ‘수용소의 노래’를 읽었는지 나에게 “요덕수용소에 있었다고?”라고 물었다. 그러고는 “나도 당신이랑 비슷한 경험을 했지. 정말 끔찍했어”라고 말했다.

신 감독은 북한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최악의 정치범 교화소(감옥)인 ‘승호리 교화소’에 갇혔다. 자신은 그나마 특별대우를 받긴 했지만 “너무나 끔찍했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수용소를 체험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공감대가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생기는 듯했다. 신 감독은 그때 여건만 된다면 북한 수용소를 그린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일에 자신의 마지막 인생을 걸고 싶지만 북한 인권에 관심 없는 국내에선 투자자도 구하기 어렵고 여러모로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수용소의 참상을 고발하는 훌륭한 대작을 내리라 포부에 부풀어 있는 듯했다.

영화 같은 인생을 살다간 신 감독이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겪은 가장 영화 같은 이야기는 정치범 교화소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그려내고 싶었던 북한의 현실을 이제 그의 뒤를 이어 누군가 영화로 만들어낼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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