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무게를 배경으로, 김대중(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서명한 ‘6·15 공동선언’은 앞으로 남북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정세현(정세현) 전 통일부 차관과 하영선(하영선) 서울대 교수, 연하청(연하청) 명지대 교수는 15일 오전 본사에서 긴급 좌담을 갖고 6·15선언에 대한 분석 및 평가 작업을 가졌다.

▲정세현=6·15 선언의 특징은 그간 논의 자체를 피해 왔다고 할 수 있는 통일 방안에 대한 합의 내지는 협의가 있었다는 점이다. 통일 원칙으로, 7·4 공동성명에 천명된 3대 원칙 중 ‘자주(자주)’를 부각시켜 명기한 것도 눈에 띈다.

▲연하청=91년 기본합의서와 6·15 선언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남북 최고 권력자간의 합의이고, 남북 정상이 현안을 모두 거론했다. 그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또 과거 남북합의들은 실무회의가 진행되지 못하면서 사장되곤 했지만, 이번에는 남북 정상이 공개 서명해 상대적으로 구속력을 갖는다. 김정일이 첫날 회담에서 “세계가 지켜본다”고 한 부분은 주변 4강까지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하영선=이번 공동선언을 21세기 남북관계의 새로운 역사를 여는 실험으로 평가할 것인가, 아니면 7·4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에 이은 제3의 유사한 역사적 실험으로 볼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다. 형식상 5개항으로 돼 있는 공동선언은 셋으로 나눠 볼 수 있다. ①항과 ②항은 이른바 근본문제에 관한 것이고, ③·④항은 당면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⑤항은 실천문제에 관한 조항이다. ③·④항에 해당되는 내용들은 쉽게 주고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주목할 부분은 ③·④항을 주고 받으면서 ①·②항을 삽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여기에 신(신)해석이 나온 것이냐 아니냐가 미래지향적 실험인지, 제3의 유사한 실험인지를 판단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7·4 공동성명의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중, ‘평화’만이 빠져있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결국 남북 정상이 ①·② 항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평화를 빼고 자주와 대단결을 협의한 것인 데, 그 과정에 신해석이 있었는 지가 관건이다.

▲정=이번 선언은 과거의 합의들과는 배경이 판이하게 다르다. 7·4공동성명이나, 기본합의서 모두 북한 체제가 불안감을 느끼던 상황에서 위기탈출용의 성격이 강했다. 그렇기에 국제정세 등 상황이 바뀌면 지키는 문제가 보장되지 않았다. 반면 이번 선언은 우리의 햇볕정책의 연장에서 나왔고 북의 나름의 계산도 작용했다.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 위원장이 본인의 시대를 여는 데 필요한 물적 토대와 국제사회의 기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

▲연=비슷한 생각이다. 이번 회담에서 김정일은 북한 사회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줬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북한의 경제위기는 98년 하반기부터 ‘U자(자)’형 모델의 바닥을 쳤다고 할 수 있다. 또 북한이 지난 수년동안 줄곧 사용해 온 핵·미사일 위협을 통한 반대급부 확보라는 작전이 더이상 먹히지도 않게 되면서, 국제사회 신뢰 확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그 과정의 핵심이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남북은 똑같이 상대방을 ‘특수관계’라기 보다는, 사실상의 국가로서 인정하고 공존의 파트너로 인정하기 시작했는 데, 이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이번 선언을 20세기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미래지향적인 21세기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의 관건은, ①·②항의 해석에 달려 있다. 이번에 ①항의 ‘자주’를 (미군철수 반외세가 아니라) 우리의 ‘열린 자주’로 해석할 공동기반이 있었는가, ②항의 통일방안에서 국가보안법 문제 해결에 대한 공동기반이 마련된 게 있었는가가 중요하다. 김 대통령은 수차례 ‘윈·윈(Win·Win)’을 언급했다. 만약 남북 정상이 6·15 선언의 해석에서 21세기적 자세를 취한다면, 모두 승리하는 쪽으로 전개될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적 해석을 한다면 양쪽 모두 지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만 승리하는 상황으로 가게 된다.

▲정=공동선언 ②항에 나온 ‘연합’ 또는 ‘연방’이라는 표현은 내용이나 그 단어의 상징성에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94년 월간조선 인터뷰를 보면, 김 대통령은 남북연합을 10여년 계속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북한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여야 연방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91년 체결된 남북 기본합의서 자체가 국가연합적 구성을 합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7·4 공동성명에 의한 남북조절위도 초보적 단계의 국가연합이라고 볼 수 있다. 연방제는 정서상 충격을 줄 수 있지만, 사실상 기본합의서 체제로의 복원인 것이다. 따라서 큰 문제가 없다.

▲연=하지만 국민정서상 혼란이 올 수 있다. ‘김정일 쇼크’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최근 대학에 인공기(인공기)가 나붙고 있다. 북한에 대한 과대 평가와 성급한 동경으로까지 발전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 내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상황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이것이 남북관계의 발목을 잡아 합의 사항을 제대로 추진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하=문제는 연합과 연방의 이론적인 차이보다 불신구조와 관련돼 있다. 북한의 과거 문건들을 보면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정부와 연방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있지만, 반(반)외세, 자주와 인민 단결의 원칙을 지키는 상대여야 한다는 부분도 줄곧 강조해 왔다. 이 부분에 대한 (21세기적 신해석이 나왔다는) 신뢰가 있으면 그때 이론적 차이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다.

▲정=최근 대외 관계 개선 노력 등 여러 움직임을 보면 북한도 패러다임을 바꾸어 21세기적으로 정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번 선언은 남북 당사자간 내부적 필요에 의한 합의이다. 이번 선언이 장기적 발전계획 하에 된 것이라면 국제정세에 잘 대처할 경우 모멘텀이 될 수 있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선언에 명시된 당국간 대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성과들을 낳느냐는 점이다.

▲연=김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서 흡수 통일을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경제력의 차이가 워낙 많으면 통일을 할 수 없다. ‘민족 경제 균형 발전’이라는 대목은,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경제지원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통일 기반을 조성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것은 제도적인 이산가족 재회문제가 명기되지 않은 것인데 이는 앞으로 당국간 협의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일회성으로 한번 떠들다 그만두면 안 된다. 또 장기수 문제만 거론되고 국군포로 등의 문제는 거론되지 않은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하=①·② 항이 구태의연한 해석에 의해 돌발적인 난관을 만들지 않는 한 ③·④항의 합의 이행은 가시적 성과를 낳으면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조심해야 할 것은 장기적 안목을 갖고 신중하게 북한의 입장도 고려할 것은 충분히 고려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경협도 너무 단기적인 흥분감에 휩싸이면 안된다.

▲정=이산가족 문제가 방문단 교환쪽으로 얘기됐는데, 이산가족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지속적인 접촉이 가능한 제도적 장치다. 지속적인 서신교환이라도 이뤄질 수 있게 해달라고들 한다. 방문단 교환도 좋지만 우편물 교환소 설치같은,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여부와 시기는, 대북(대북) 경협이 어느 정도 진전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하=6·15 선언 이후, 국제 문제에 일정한 비중을 두어야 한다. 한반도의 역학관계가 모든 문제를 완전히 자주적으로 풀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윈·윈(Win·Win)’이라는 김 대통령의 설명에 북측이 공감한다면 최상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국무부의 논평은, 역사적 중요성을 환영하면서도 회담의 성과가 긴장완화의 방향으로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식으로, 묘한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을 완전 만족시키면 북한이 섭섭할 것이고, 반대로 북한이 만족하면 미국이 섭섭할 수 있다. 결국 우리 정부는 미묘한 줄타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굉장히 세련된 전략이 필요하다.

▲정=한·미·일 공조는 계속되어야 한다. 핵과 미사일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미·북, 일·북관계의 개선은 불가능하다. 미·일도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 대통령이 핵·미사일을 주(주) 의제로 삼기는 어렵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당사자 원칙’을 중심으로 급격히 부상하는 데 대해 충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능동적인 4강 외교를 펼치지 않으면, 한반도 문제가 다시 4강들의 역학관계 속에 파묻히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하=여기까지 오기도 상당히 힘든 길을 왔다. 6·15 선언이 21세기 새로운 남북관계의 지표가 되려면 지금부터가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 언론이 무슨 연예계 행사를 다루는 것처럼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 역사적 중요성과 한계 등을 조심스럽게 따져서 국익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신중함이 결여돼 있다. 정부도 굳이 과장하지 않아도 적지않은 가시적 성과가 있었던 만큼 앞으로는 오히려 이번 일에 대한 홍보를 줄여야 할 것이다.

▲연=김 대통령이 떠날 때 뜨거운 가슴, 차분한 머리라고 말했는데 그 자세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적 기대와 과잉 흥분으로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박두식기자 dspark@chosun.com

/김덕한기자 duck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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