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대한 무식과 왜곡,
젊은 세대의 정신적 무장해제 시도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법무장관이 개별 형사사건에까지 직접 수사 지휘를 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날 당사자인 강정구 동국대 교수는 한 인터넷 신문에 또 글을 올려 그 동안 자신의 발언에 대한 장황한 해명과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글 첫머리에서 그는 20년전 박사 논문을 쓰던 때을 회고하며 "해방인 줄 알았더니 또 다시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한 외세가 우리 역사를 난도질 한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고, 더구나 이런 오욕의 역사를 오욕이 아니라 자랑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은 역사 왜곡에 의분과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현대사 바로 그리기’와 ‘통일 터닦기’를 학문적 소명과 정체성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썼다.

그러나 불행히도, 강교수는 현대사 "거꾸로" 그리기와 "적화" 통일 터닦기에는 어느 정도 성공한것 같다.

강교수의 글과 언행이 실정법을 위반했는지 여부는 사법부가 판단하겠지만, 필자는 강교수에게 분명히 한가지 죄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 죄는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잘 알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일부러 왜곡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친 죄, 또 그렇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을 "해방시켜야할 지역"으로 규정하고 있는 북한정권(反국가단체)에 대한 우리 국민, 특히 순진한 청소년 학생들의 경각심을 무너뜨리고 그들을 정신적으로 무장해제시켜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죄다.

강교수는 자신의 글이나 발언은 모두 학문적인 중립성을 유지하여 역사적 사실을 모두 객관적으로 서술했을 뿐, 좋다, 나쁘다, 가치 판단은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장 최근 글에서 그는 "사실 차원에서 (6.25가) 통일전쟁이고 맥아더가 전쟁광이라고 본 것이지 잘됐고 못됐고의 가치 논의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은, 맥아더가 전쟁 미치광이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고 그 결과 김일성이 통일전쟁에서 실패했다고만 말했지 그래서 원통하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

이런 논법은 "나는 '저 여자 몸매 죽여준다'고만 말했지 '저 여자 몸매 죽여준다. 한번 안아보고 싶다'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과 비슷한 소리다. 강교수의 최근 글은 이런 식의 언어적 기계체조로 가득 차 있다.

앞에서 필자는 강교수의 죄는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무지와 왜곡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그 증거를 제시하겠다.

강교수는 지난 8월14일 한 주간지 기자에게 자기가 한 인터넷 신문에 기고한 글을 설명하면서 해방 직후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의 사령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맥아더와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을 봐라. 둘 다 점령군임에는 틀림없지만, 맥아더의 포고문을 보면 그가 구세주고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은 완전히 우리만의 짝사랑이다. 오히려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포고문, 그거야말로 조선 민중에 대한 애정이 담겼다. 그래서 난 두개의 포고문을 내 글에 모두 적었다. 빨갱이몰이 하는 것은 좋은데 이런 것을 좀 읽고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조선민중에 대한 애정이 담겼다고 강교수가 감탄한 소련 점령군 사령관 포고문과 미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의 포고문을 비교해 보자.

▲태평양 방면 미군 총사령관 맥아더 포고령 1호

(제1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인에 대한 모든 통치 권한은 당분간 본관이 시행한다.

(제2조) 정부 등 모든 공공 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중요한 각종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현재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하고 보존해야 한다.

(제3조 생략)

(제4조) 조선 주민의 재산권은 존중한다. 모든 주민은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일상적인 직무에 종사하라.

▲북한 점령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포고문

소련과 연합국 군대는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몰아내었다. 조선은 자유의 나라가 되었다. 조선 인민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여러분 손안에 있다.

여러분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렸다.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

조선 인민은 반드시 스스로 자기 행복을 창조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소유자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일본인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를 원상회복시켜라!

새로운 생산활동을 시작하라! 우리 붉은 군대 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도울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맥아더 포고문은 미사여구는 일체 생략하고 꼭 필요한 말만 한데 비해 소련군 사령관 포고문은 공산당 특유의 선동적 미사여구를 먼저 나열하고 다음에 필요한 말을 덧붙였다. 포고문만 보면 분명히 소련군 포고문이 마음에 와닿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점령군들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강교수는 소련군 사령관의 포고문만 보고 감격했을 뿐,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와 어떤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정치학자 김학준 박사(전 서울대 교수)가 쓴 "북한 50년사" (1995, 두산동아 발행) 77∼80쪽에서 일부를 인용한다.

"유고술라비아 부통령 질라스가 1945년 4월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였다......(소련수상) 스탈린은 '(우리가) 점령한 동유럽 일대에서 소련군이 현지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있다고 항의를 하는데, 나치 독일군을 패퇴시키기 위해 영웅적인 붉은 군대의 장교나 사병이 휴식을 취하는 수단으로 그렇게 했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냐'고 되물었다....그뿐 아니다.

강간에 항의하는 현지 청년을 그 자리서 쏘아죽인 소련 장교에게 강간죄와 살인죄를 적용해 소련의 군법회의가 사형선고를 내린 것을 알고 자신이 나서서 무죄 석방시켜주었다고 스탈린은 자랑까지 했다....

스탈린이 이 모양이니 그의 하졸배야 오죽했겠는가. 아닌게 아니라 거지떼 모양의 소련 점령군 일부는 (북한에서) 강도와 강간의 길에 나섰다.

그들은 무엇이든 빼앗았다. 러시아말로 달라는 것을 '다와이'라고 하는데 소련병사들은 아무 곳에서나 '다와이'라 소리지르며 빼앗아 갔다.

그들은 특히 시계를 좋아해 평양 거리에는 팔에 시계를 너댓개씩 차고 다니는 소련병사들이 수두룩했다. 일본 여자들의 경우는 대낮에도 (강간을) 당했다.

그래서 상당수의 일본 여자들은 아예 머리를 완전히 깎고 얼굴에 숯댕이를 바른채 남장을 해야했다....야밤에 조선여자들도 당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평양 주민들은 집 대문에 대야를 걸어놓고 근처에 소련 병정들이 나타났다 하면 대야를 두들겨 이웃들에게 알려주면서 공동대처했다....

소련 점령군사령부는 병사들의 행패를 모르는 척했다.... 마침내 북한 청년들 사이에 은밀하게 자경단(自警團)이 조직되었다. 야밤에 한 둘씩 다니는 소련 병사들을 돌로 때려 죽인 일도 일어났다.

그래서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밤중에는 절대로 혼자나 둘이서는 다니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야 했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병사 개인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점령군 차원에서 북한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의 손실을 메운다는 취지에서 북한에서 공장을 비롯해 산업 시설물들을 마구 뜯어갔다.

금을 비롯한 각가지 광물들은 물론, 심지어는 달걀과 채소까지 소련으로 강탈해 갔다. 은행에서는 일본인들의 예금은 물론 조선인들의 예금도 빼내어갔다...

소련점령군은 붉은 군표를 발행해 소련병사들로 하여금 그것을 내고 물건을 사도록 했는데 뒷날 한푼도 현금으로 바꿔주지 않아 북한 상인들은 엄청난 손해를 감당해야 했다.... " (저자는 소련군 만행 정보 출처를 책에 다 밝혔다.)

워싱턴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에서도 필자는 비슷한 기록을 하나 발견했다.

1945년 9월 8일 인천에 미군이 처음 상륙했는데, 바로 그날 일부 병력이 38도선 바로 밑에 붙어있는 고도(古都) 개성으로 가보았더니 소련군이 거기까지 내려와서 물건을 약탈하고 부녀자 강간을 한 흔적이 즐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련 점령군은 "붉은 군대는 왜 조선에 왔는가?"라는 포고문에서 "붉은 군대는 무한히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엄포를 놓고나서 "그러나 우리 붉은 군대는 조선에 소비에트 제도를 강요하거나 조선 영토를 얻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해놓고는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당시 33세의 청년)을 앞세워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고 북한에 소비에트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위에 소개한 치스차코프 사령관 포고문에서는 "이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렸다'고 말해놓고는 소련식 공산주의를 강요한 것이다.

우리가 다 아다시피 소련식 공산주의는 70년만에 막을 내리고 러시아는 이제사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걸음마를 배우고 있으니 서구 선진국에 비해 70년이란 세월을 허송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아직도 그 체제를 고집, 세계 최하위 경제권에서 맴돌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강교수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치스차코프 포고문이 "조선민중에 대한 애정이 담겼다"고 감격했다. 필자의 짐작으로는 그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소련군의 만행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교육자에게는 공부 안 하는 것이 큰 죄다. 역사를 가르칠 때 필요한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 역사적 사실을 바른대로 가르칠수가 없을 분만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 가르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강교수가 공부를 많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앞서 언급한 주간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한반도 분단은 1945년 8월15일 미 군정 일반명령 1호에 의해 남북을 38선을 기준으로 지리적으로 분단시키면서 시작된 것이다....이런 지리적 분단은....8월11일 러스크라는 중령이 국무성 한구석에서 확정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조선의 그 어느 집단과 한마디 상의한 적도 없다. 또 함께 전쟁을 치른 연합군, 특히 이미 8월 초 (한반도) 북쪽에 상륙해서 관동군을 뒤로 밀어내는 공격 작전을 펼친 소련과도 한마디 상의가 없었다.

소련군이 조선 땅에서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운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미 조선 땅에서 피 흘리고 조선 해방에 도움을 준 주체였다.

그 소련과도 한마디 상의 없이 8월11일 지도 하나 놓고 선 하나 쫙 그었다. 그것도 중령 한 사람이. 그게 현실이라고 하자. 물론, 그게 현실이다.

하지만 현실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비록 현실이지만 약육강식·반도덕적 행위, 남의 주권과 자주권을 여지없이 짓밟은 행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다르다. 침묵하는 것은 지식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게 대학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가르친다는 교수가 한 말인지 믿기가 어렵다. 그는 소련군이 "조선 땅에서 피 흘리고 조선 해방에 도움을 주었다"고 했는데,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피를 흘렸다(사상자가 많았다)는 기록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일본은 원자탄 2개를 연달아 맞고 8월9일 이미 항복을 결심, 연합국에 그 의사를 전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 관동군은 소련군에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피를 흘린 일이 있기는 있다. 그것은 그들이 조선인 부녀자를 강간하다 조선 청년들한테 얻어맞아 죽을 때 뿐이었다.

강교수는 또 미군 중령이 지도 하나 놓고 선 하나 쫙 그었다고 했는데, 미국이 어떤 상황에서 왜 38선을 그어야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바가 없는 것 같다.

(불행히도 한국에서 나온 거의 모든 역사책은 미국이 38선을 그어서 남북이 분단되었다는 것만 강조할 뿐, 미국이 38선을 왜 그어야했는지, 그리고 38선을 그었기 때문에 우리가―적어도 우리 민족의 3분의 2는― 어떤 혜택을 누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거의 없다. 앞으로 나올 교과서 등에서는 이 점이 부각되어야 하겠다.)

38선을 직접 그은 딘 러스크 중령(후에 국무장관),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 제임스 번즈 당시 국무장관의 회고록,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기록들을 참고하여 필자가 재구성한 38선 형성 과정은 이렇다.

38선이 그어지기 6개월 전인 1945년 2월 4∼11일 소련 크림(크리미아)반도에 있는 얄타(Yalta)라는 곳에서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들인 미국, 영국, 소련의 최고 지도자들이 모여 머지않아 끝나게 될 전쟁에 대해서 논의했다.

미국의 로오즈벨트(루스벨트나 루즈벨트는 정확한 발음이 아님)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수상은 우선 독일이 항복하면 미, 영, 불, 소 4개국이 독일 영토를 분할 점령한다는데 합의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은 소련에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해서 태평양 일대에서 일본과 싸우고 있는 미, 영군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유럽에서 미국과 영국이 독일을 상대로 싸웠기 때문에 소련이 히틀러 군대에게 점령되는 위기를 모면했으니까 소련도 그 은혜를 태평양 전선에서 갚을 필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일본에게 빼앗겼거나 양보한 쿠릴열도와 사할린 남부를 종전 후 되찾게 해주겠다는 미국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참전을 거절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련은 6개월 내로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3개월 후인 5월 7일 독일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소련에게만은 일단 전쟁이 끝난 셈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다시 재촉했다.

그러나 소련은 차일피일 참전을 미루다가 8월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을 보고서야 8월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런데 이날은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약속한 6개월 시한이 끝나는 바로 그 날이었다. 한마디로 얌체같은 참전이었다.

소련의 선전 포고가 있은 직후 미국은 두번째 원자탄을 이번엔 나가사끼에 떨어뜨린다. 8월 9일 일본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 불가 등 몇 가지 조건을 달아 항복하겠다고 연합국에 통보했으나 거절당한다.

한편 만주 및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은 급속히 군대를 만주와 한반도로 들여보냈다. 일본 관동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의 대일전은 누워서 떡먹기였다.

선전포고 바로 다음 날인 8월 9일엔 벌써 함경북도로 진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미군은 한반도에서 1,000 km나 떨어진 오끼나와에 최전방 병력이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열도에 들어가는 것이 선결과제였으므로 일본에 주로 신경을 쓰면서도 한반도에서 급속히 남하하는 소련군이 마음이 걸렸다.

그냥 두면 몇 주일 내로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할 것이 뻔했다. 그때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 때 점령한 동유럽 여러 나라(동독, 폴랜드, 체코,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를 모두 공산주의 위성국가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이런 사실을 알고있었던 미국은 한반도도 동유럽과 같이 소련의 위성국이 될 염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단 소련군의 남하를 38도선에서 막기로 결정하고 즉시 소련에 통고했다. 소련은 당시 대일전에 참전한지 1주일도 안된 상태였고, 또 당시 일본의 영토였던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차지하기로 미국의 양보를 얻어놓은 상태였으므로 미국의 38선 설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즉각 수락했다.

이래서 38선이 생긴 것이다. 만일 이때 소련군이 한반도를 다 점령하게 내버려두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한반도는 둘로 갈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 없는 한, 한반도 전체는 동유럽 각국처럼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을 것이다. 소련군은 이미 북한의 공산화 계획을 가지고 소련군 대위 출신인 33세의 김일성을 데리고 북한에 들어와 북한 주민 대다수의 지지와 존경을 받고있던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을 제거하고 공산정권을 세웠다.

그러고 보면 미국이 38선을 그어 소련의 남하를 막고 남한만이라도 미군 점령지로 택한 것은 결국 우리 영토의 절반과 인구의 3분의 2를 공산주의로부터 구해준 계기가 되었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통해 38선이 그어진 사실을 강교수가 알고있었다면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이상한 소리를 했을 리가 없다. 그가 한국 근·현대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번에는 강교수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사례를 하나 보자. 강교수는 지난 9월30일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정책 토론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① (해방 직후)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분명 남·북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② 당시 조선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보다 더 좋아했다.

③ 1946년 8월 미군정 여론국이 전국의 8,45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지지 세력이 77%이며 자본주의 지지는 겨우 14%였다.

그러므로 당시 조선사람 대부분이 원하는 공산주의체제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강교수가 사용한 자료를 찾아보니 내용은 상당히 달랐다. 강교수가 여론조사 결과를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왜곡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1946년 4월 군정청은 조선인들이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을 제외한 도시와 농촌지역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이런 조사 같은 건 아예 하지도 않고 북한에 공산주의를 강요했다).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미국식 민주주의가 좋다는 응답이 농촌에서 38%, 도시에서 34%였다. 소련식 공산주의 선호는 농촌서 11%, 도시에서 10%)였다. 두 제도의 혼합형은 농민 30%, 도시인 45%가 선호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서울 시민 1만명에게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는가?"라고 질문했더니 의회 민주주의 85%, (플로레타리아)계급의 지배(공산주의) 5%, 소수 집단 독재 4%, 1인 독재 3%로 선호도가 나타났다.

또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사회주의 70%,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로 나타났다. 이것은 당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공산주의 정부형태나 경제체제를 원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강교수는 위의 ②항에서 보는바와 같이 당시 조선사람들은 공산주의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워줘야 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70% 지지를 얻은 사회주의도 공산주의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정치·경제 제도로서 당시 조선인 들은 사회주의를 그 당시 집권한 영국 노동당의 정책―하루 8시간 노동, 의무교육 확대, 전국민 의료보험 등등― 정도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는 가장 최근에 쓴 글에서 이 여론조사는 자기 논문의 각주(脚註)에 불과하다고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는데, 각주에는 무엇을 써도 괜찮다는 소린지 알 수가 없다.

강교수는 또 6.25 전쟁이 김일성의 통일내전이라면서 "내전"을 강조함으로써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 전쟁이 내전이든, 국제전이든 그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3분의 2가 싫다는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무력으로 ―그것도 사전에 소련과 중국이라는 외세로부터 무기와 병력 원조를 받고―강요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강정구 교수는 이와 같이 한국 근·현대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언론 매체를 통해 확산시킨 킴으로써 직·간접적으로 6.25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을 찬양하고, 미국의 개입으로 김일성이 한반도 공산화 통일에 실패한 것을 애석해 하는듯한 발언을 했다.

그는 또 대한민국을 여러 차례 적화(赤化) 위기에서 구출해준 미국을 원수의 나라로 지칭하여 불필요한 반미(反美) 감정을 부추기고, 구체적인 대안의 제시도 없이 주한 미군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장애물이 된다는 북한 정권의 주장을 앵무새 같이 되풀이함으로써, 대한민국을 "해방"시키겠다고 공언하는 현 북한정권에 대한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의 경각심을 무너뜨리는 정신적 무장 해제를 시도하고 있다. 이것이 강정구 교수의 가장 큰 죄이다.


강교수는 대한민국에 사상의 자유가 있으므로 자신의 이런 행동을 처벌할 수 없다고 말하겠지만, 바로 그런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고 남한을 "해방시켜야할 지역"으로 간주하는 북한 정권을 학문이라는 미명하에 고무, 찬양하는 것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0월12일 워싱턴에서

조화유<소설가, 영어교재 저술가>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인 <조화유 블로그>(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778&logId=655725)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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