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공식적인 조선노동당 창립일은 1945년 10월 10일이다. 60년 전의 그날 평양에서는 ‘조선공산당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13일까지 계속됐는데 일본의 북한 연구가인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는 13일 하루만 열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대회에서 현 조선노동당의 모체인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결성된다.

대회는 ‘조선 무산계급의 영수 박헌영 동지 만세’를 부르고 북조선분국이 서울 당 중앙의 직영 직속기관이라고 규정했으나 이는 수사(修辭)였고 실제로는 새로운 당 중앙의 탄생이었다. 분국 설치는 1국1당주의라는 코민테른(Comintern:제3국제공산당) 강령 2조 위반이어서 이주하(李舟河)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반대했으나 소용없었다.

박헌영은 10월 23일 북조선분국 수립을 승인하는데 이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권이 김일성에게 넘어가는 전주곡이자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자필서명이었다.

분국은 출범 직후부터 ‘중앙국’으로 자처했고 김일성은 ‘권위 있는 선’을 남파해 박헌영의 당 중앙을 흔들었다. 1946년 10월 미군정의 수배령을 피해 월북한 박헌영은 북한 부수상과 외상 등을 역임하다가 6·25전쟁 와중에 체포되어 남로당 세력이 모두 숙청된 1955년 12월 특별재판에 회부된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교장 언더우드(H. H. Underwood)에게 포섭된 미국 간첩이란 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데 이 무리한 정적 숙청에 대한 반발은 북한에서도 적지 않았다.

김일성 직계였던 갑산파의 박금철(朴金喆)이 1958년 3월의 당대표자회에서 연안파의 최창익(崔昌益)을 “인민의 정당한 심판을 받은 박헌영 등의 무죄석방을 획책하였다”고 비판한 것은 북한 내 반발의 강도를 말해준다.

그러나 소련의 트로츠키가 망명지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라몬에게 도끼로 살해당하고 류사오치(劉少奇)가 문화혁명 와중에 홍위병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박헌영의 비극은 1인자를 꿈꾸었던 2인자 사회주의자의 예정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숙청 위에서 만민평등의 사회주의는 1인 절대 권력의 전체주의 체제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newhis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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