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相敦 중앙대 교수·법학

1980년대 대학가에는 이른바 ‘사회과학 서적’을 전문으로 팔던 서점이 있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운동권 이념서적을 주로 팔던 서점들이었다.

훗날 ‘386 세력’이 된 당시의 대학생들은 학과 공부는 제쳐놓고 무리를 이뤄 이런 책들을 읽고 밤새 토론했다. 노무현 정권의 주축세력이 된 이들의 정신세계는 이런 책들이 그려낸 것이다.

오늘날 대학가에서 그런 서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1990년대 들어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짐에 따라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한때 사라진 데다가, 우리 사회도 민주화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좌파 성향의 책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책들은 제도권으로 조용히 편입돼 일반 서점에서 당당하게 팔리고 있다.

1990년대 후반기부터는 수정주의 역사책과 반미(反美) 서적 출판이 봇물을 이루었다. ‘마르크스 전기’ ‘체 게바라 평전’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이한 현상마저 생겼다.

이런 흐름을 타고 급진좌파인 놈 촘스키·하워드 진 등이 쓴 책이 줄줄이 번역 출판됐다. 특히 촘스키의 책은 거의 전부 번역됐는데, 그때마다 서평자들은 그를 ‘미국의 양심’으로 치켜세웠다.

하지만 촘스키는 크메르 루주가 저지른 킬링 필드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선 침묵하거나 부인하면서, 9.11 테러는 정당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병적(病的)인 반미주의자로, 미국의 진보진영도 멀리하고 있는 인물이다.

한편 최근 미국에서 보수 책의 대성공에 힘입어 몇몇 출판사가 그런 책들을 번역 출판했다.

미국 진보좌파의 위선과 허구를 파헤친 ‘쓸모있는 바보들’, 민주주의의 과잉이 자유를 위협함을 지적한 ‘자유의 미래’, 진보적 편견에 사로잡힌 미국의 CBS 방송을 파헤친 ‘뉴스의 속임수’ 등이 그런 책이다.

하지만 미국에선 대단한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들은 국내에선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큰 손해를 본 출판사들은 “보수는 책을 안 읽는다”고 말하면서, 다시는 보수 성향 책을 내지 않겠다고 한다.

책이 팔리고 안 팔리는 것은 시장의 원칙이지만, 이런 현상은 지난 20년간의 ‘문화 전쟁’에서 보수가 패배했음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문제는 물론 ‘독서시장’에서의 패배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맥아더가 한국전쟁의 전범(戰犯)이라든가, 미국 때문에 1950년에 통일이 실패했다는 황당하고 뻔뻔한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오는 것도 어떻게 본다면 ‘20년 문화전쟁’에서 보수가 패배한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러면 문화전쟁의 최전선인 독서시장에서 보수가 패배한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지난날의 권위주의 정권이 진보성향 책을 탄압한 데 대한 반작용으로 진보서적이 잘 팔리는 면이 있을 것이다. 추상적 관념을 다루는 진보 책에 비해 구체적인 역사와 사실을 다루는 보수 책은 접근과 이해가 쉽지 않은 것도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우리나라의 보수는 책을 읽지 않는다는, 창피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진보 독자층은 대학시절부터 책 읽고 토론하는 것이 체질화돼 있는데 비해 보수 독자층은 그런 문화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나라 보수가 이 사회를 움직이는 주력(主力)이자 주류(主流)가 되고 싶다면 ‘문화전쟁’의 최전선인 책 시장을 지켜야 한다.

책 시장의 관건은 공급이 아니라 수요에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수가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해서, 진보세력의 위선과 허구를 논박한 책을 사면 출판사는 그런 책을 찍어 낼 것이고, 그러면 보수 필자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보수 책을 펴내는 ‘선순환(善循環)’이 생길 것이다.

독서 아카데미 운동 등을 통해 스스로 지식시장을 창출할 때 한국의 보수는 ‘20년 패배’로부터 비로소 만회하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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