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위 계층에서 부유층으로 급부상
'장사꾼' 이미지 강해.. 자장면집은 한 곳뿐



◇ 화교와 북한의 합영회사로 설립된 평양 만경대구역 광복거리의 향만루식당.

북한의 화교들은 중국과 북한을 잇는 ‘통로’다. 이들을 통해 중국식 시장경제가 북한내부에 확산되고 있다. 북한의 장마당에서 유통되는 생활 필수품의 60~70% 정도가 이들이 들여오는 중국산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식량난이 악화되고 국가 공급체계가 무너지다시피 한 북한에서 화교의 역할은 더욱 증대될 전망이다. 1991년 중국에서 발행된 '조선화교사'(朝鮮華僑史)에 따르면 북한에 약 6만 명, 남한에 2만여 명의 화교들이 살고 있다.

남한 사람들은 화교하면 ‘중국집 자장면’을 떠올리지만 북한에서는 ‘장사꾼’을 연상한다. 개인영업을 허용하지 않는 북한에서는 화교들이 운영하는 자장면 집이 생겨날 수가 없다.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평양 광복거리에 화교와 합작으로 생겨난 대형 중국음식점 ‘향만루식당’이 자장면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북한의 화교들은 대부분 중국과의 연줄을 이용해 무역활동을 하고 있다. 북한 최대의 ‘무역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화교들은 일부 재일 북송교포들과 함께 새로운 부유층으로 부상했다. 화교들은 중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으며 1년에 두 번은 공식적으로 중국을 방문할 수 있다. 이 기회를 이용해 화교들은 ‘달러 장사’를 비롯해 개인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북한 당국은 화폐가 국경지대의 화교들에게 집중적으로 몰리자 1991년 화폐개혁(정확히는 화폐교환)을 단행해 화교들이 가지고 있던 막대한 돈을 회수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돈이 국경지대에 몰리는 통에 내륙지방의 공장에서는 월급도 제대로 줄 수가 없었다는 후문도 있다. 당시 평북 신의주를 비롯한 주요 국경도시에서는 화교들이 돈을 아예 김칫독에 넣어두는 집이 많았다고 한다. 화폐개혁 때 수백만 원(노동자 평균 월급 100원 안팎)의 북한돈이 나온 집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북한 돈을 끈으로 묶어 무게로 달기도 했다. 화교들 대부분은 적게는 4~5만원, 보통 수십만 원씩 갖고 있다고 한다.

화교들은 북한 주민들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 조직생활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고 정치적 발언의 허용 범위도 넓은 편이다. 국적을 바꿔 북한 주민으로 살다가 정치범으로 끌려갔던 어떤 화교출신 가족은 국적을 다시 중국으로 바꾼다는 조건으로 석방된 경우도 있다.

화교들은 중국산 물건을 통해 중국식 개혁, 개방의 필요성을 알게 모르게 북한주민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85년 이후부터 화교들에게는 거주이전의 자유도 부분적으로 허용돼 상대적으로 살기 좋은 평양이나 남포, 평남 평성, 함북 청진, 평북 신의주 등에 주로 모여 살고 있다.

북한 화교들의 처지가 이렇게 좋아진 것은, 중국의 형편이 북한보다 훨씬 좋아지기 시작한 1985년 경부터다. 이전에는 북한사람들에게 노골적으로 무시당하면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국적을 북한으로 바꾸어도 결혼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화교와 결혼하면 여러가지 사회적 제약이 따랐다. 화교 여성이 북한 남자와 결혼하면 중국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북한 대학생이 화교 여성과 사귀다 퇴학당한 일도 있었다. 화교 남자에게 시집간 북한 여성에게는 배급이 끊어지기도 했다.

화교들의 대학진학은 매우 어려워 김일성종합대학 같은 일류 대학에는 화교협회 회장 등 몇몇 지도급 인사의 자녀들만 진학했고, 대부분은 중국으로 가서 공부하거나 일찌감치 장사길에 나서야 했다. 중국이 개혁, 개방을 하기 전 북한내 화교들은 대부분 농촌이나 지방 도시에서 노동을 하면서 거의 최하층 생활을 해야 했다. 특히 중국 문화혁명(66-76년) 때 대거 북한으로 넘어 간 화교들의 어려움이 컸다. 다만 6.25 참전 중국군 출신의 화교들은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강철환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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