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원로 홍덕영씨가 서울 옥수동 자택에서 유은영 조선일보 인턴기자(숙명여대)에게 축구 인생을 들려주고 있다. /허영한기자 young.chosun.com

"48년 스웨덴戰 48개 슛 막느라 가슴이 얼얼
요즘 후배들 정말 잘해… 월드컵4강 운 아냐"


광복 후 한국 대표 축구팀의 첫 번째 해외 원정(1947년), 첫 번째 올림픽 출전(48년), 첫 번째 월드컵 본선 출전(54년)에서 골문을 지킨 수문장 홍덕영(79)씨.

한국 축구의 산증인으로 김용식, 거스 히딩크 등 6명과 함께 대한축구협회가 선정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홍씨의 서울 옥수동 아파트엔 그 흔한 기념사진이나 트로피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늙은이한텐 옛날 사진이 한 장도 없어. 협회나 월드컵기념관 같은 곳에 다 줬지. 그런 게 뭐 소용 있나? 내 마음속에 다 있는데….”

홍씨는 당뇨병과 합병증으로 인해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 그의 축구 인생을 듣기 위해 유은영 조선일보 인턴기자(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3학년)와 함께 그의 아파트를 찾았을 땐 그의 건강을 생각해 1~2 시간 정도만 인터뷰를 하려 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담아둔 자신과 한국 축구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가는 홍씨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까 어느덧 5시간이 지나버렸다.

◇한국축구는 1954년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당시 골키퍼로 나선 홍덕영씨가 경기에 앞서 망치를 들고 자신의 축구화를 수선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광복 후 8년간 국가 대표 골키퍼를 하셨다면서요? 처음 해외 원정 경기는 어디서 하셨어요?

“상하이였어. 1947년 4월 10일 쌍발 프로펠러 미군 수송기를 타고 중국 땅에 내렸지. 난생 처음 타본 비행기야. 4월 13일 소련구락부와 첫 경기를 하는데 김구 선생이 설립한 인성학원 학생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거야.

왜 옛날 애국가 말고 요즘 부르는 거 있지? 처음 태극기가 나부끼는 축구장에서 애국가를 들으니까 모두들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지.”

―1948년 런던올림픽에도 나가셨다면서요.

“그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전한 대회였어. 8강까지 올랐지. 그때 난 후보골키퍼였어. 부담없이 구경이나 하고 오자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나보다 열살 위인 주전 골키퍼가 연습 경기에서 허리를 다치셨지 뭐야.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어른이 된 뒤 처음으로 기도라는 걸 했어. ‘하나님, 나 잘못했다고 빌면 다 용서하고 봐주실 거죠?’라고 말이야. 사실 기도가 아니라 시비에 가까웠지.”

日군화 고쳐 신고 공차

―결국 시합에 나가셨군요. 첫 상대는 어디였나요?

“멕시코였어. 그때도 프로팀이 있던 축구 선진국이었지. 그런데 내가 첫 슈팅을 막아내니깐 대선배인 김용식씨가 ‘덕영이 잘했어’라고 격려해주더군. 그때부턴 용기가 나고 겁이 싹 달아났어. 결국 우리가 5대3으로 이겼지. 멕시코 응원단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

―그 다음 경기는 어떻게 됐나요?

“8강전 상대가 스웨덴이었지.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아 그런데 우리는 그때만 해도 비가오면 축구를 아예 안 했거든. 난생 처음 수중전이란 걸 하게 됐는데 우리선수들보다 목 하나는 더 큰 스웨덴 선수들이 슛을 하면 커다란 흙덩이가 날아오는 거 같았어.

가슴에 턱턱 부딪히면 숨이 다 막혔지. 경기가 끝난 뒤에도 가슴이 얼얼하더군. 그때 스웨덴의 슛이 48개였다는데, 0대12로 졌으니 그나마 내가 잘 막은 셈이지?”

―축구는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함남중학교(함흥고등보통학교) 1학년 시절부터 했어. 일제 때 함흥 우리 집은 광문당이라는 서점과 체육사를 운영했지. 체육사는 축구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고, 큰형님은 함흥축구단의 총무를 맡고 계셨어. 그 덕에 나도 자연스럽게 축구를 하게 됐지.”

―당시에도 축구 선수들이 인기가 많았다면서요.

“대단했지. 축구밖에 다른 스포츠는 없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요즘처럼 오빠부대 같은 여자 팬들은 없었어요. 여자가 축구 보러 간다고 하면 ‘그 여자 돌았다’하던 시절이었거든. 일본이 1942년 축구마저 금지하는 바람에 공도 못 찼지만 말이야.”

광복후 상해(上海) 첫 원정, 태극기 휘날리니 눈물이…
54년 첫 일본전 마치 전쟁 나가는 기분이었어
오빠부대 없었지만 그때도 축구선수 인기 대단


―남쪽엔 언제 내려오셨어요?

“난 1926년 5월 5일 함흥에서 태어났어. 함흥에서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늦게 알려져 3월 8일에 시작됐다는군. 기독교인들이 주도했는데, 아버님(홍기진씨)이 그중 한 분으로 1년6개월간 옥살이를 하셨지. 그런데 광복이 되고 나니 함흥은 소위 ‘빨갱이’ 천지가 됐어. 그래서 38선을 넘을 결심을 했지. 1946년 1월이었어.”

―남쪽에선 어떻게 선수 생활을 하게 됐습니까?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편입 시험을 봤어. 우연히 보성전문학교 축구부의 골키퍼가 약하다는 얘기를 듣게 됐지. 축구를 좀 했다고 하니까, 곧바로 축구부에서 테스트를 해보자고 하더군. 그런데 내가 축구화가 있나?

그 길로 일본군 군화를 구해 구두수선공을 찾아가서 ‘뽕’(스터드·신발이 바닥에서 밀리지 않도록 하는 돌기)을 달아달라고 했지. 골키퍼를 해 본 경험도 있고 해서 무사히 통과했고, 그 길로 계속 축구만 한 거지.”

―축구하면 한·일전을 빼놓을 수 없는데, 광복 이후에 일본과의 첫 경기 기억나시나요?

“그럼. 1954년 스위스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중국이 기권하는 바람에 한국과 일본이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붙게 됐지. 그러나 그때는 국교정상화가 되지 않은 상황이라서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팀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어.

결국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하게 됐지. 당시 장택상 축구협회 회장이 선수단을 불러 ‘일본에 지면 현해탄을 건너 돌아올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

―광복 후 첫 한·일대결이라 감회가 남다르셨겠어요.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었지. 1954년 3월 7일 하고 14일이었어. 첫 경기 전날 도쿄에 진눈깨비가 내려 경기장이 진창이었는데…. 정말 전쟁터에 온 느낌이었지. 그런데 거기에 태극기가 게양된 거야.

역사상 처음으로 태극기가 일본땅에서 정식으로 게양되고, 애국가가 연주됐으니…. 우리가 5대1로 1차전을 이겼지. 교포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 결국 2차전에서 2대2로 비기면서 1승1무로 한국이 월드컵 티켓을 따냈지.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교포들도 애국가를 함께 부르며 모두 엉엉 울었어.”

―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 헝가리전 때 푸스카스 선수의 슛을 막다가 가슴에 멍이 들었다면서요? 그렇게 슛이 세던가요?

“아, 그건 좀 와전된 거야. 런던올림픽에서 스웨덴하고 맞붙을 때 얘기가 그렇게 바뀌었더라고. 물론 헝가리 선수들도 정말 대단했어. 푸스카스는 나보다 키도 작았는데, 왼발로 때린 슛이 골대에 맞으니깐, 한참을 ‘딩~’하고 울리더군.

당시 헝가리는 ‘어떤 팀을 만나도 10분 이내에 2골은 넣는다’는 신화가 따라다니던 팀이야. 그런데 우리는 ‘마의 10분’을 무실점으로 견뎠지.

하지만 결국 0대9로 졌어. 후반에는 4명이 쓰러져서 나머지 7명이 악전고투했다니깐. 당시엔 골키퍼 말고는 선수교체를 못할 때였거든. 나중엔 너무 힘들어서 공을 잡으면 관중석으로 차냈지. 그때는 공을 1개만 가지고 할 때여서 경기장에 다시 들어올 때까지 시간을 벌 요량이었거든. 2진들이 나선 터키전에서는 0대7로 졌지. 그게 내 선수 생활의 마지막이었어.”

지면 현해탄 건너지 말라

―2002 월드컵축구는 현장에서 보셨나요?

“아니. 그때 병원에서 치료 중이었어. 그래도 축구는 보고 싶어 아들집에 가서 TV로 봤지. 반세기 만에 후배들이 이 늙은이의 한을 풀어주는 것 같아서 정말 고맙고 대견했어.”

―요즘 한국 축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말 잘해. 한국이 월드컵 4강에 간 걸 운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난 운이 왔을 때 그걸 잡을 수 있는 것이 실력이라고 믿어. 박지성처럼 유럽에서 뛰는 선수도 많잖아? 일본 선수들이 대부분 실패하고 왔는데, 한국 선수들은 꼭 성공했으면 좋겠어. 그게 일본을 이기는 또 다른 길 아니겠어?”/정리=조정훈기자 donju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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