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훈씨가 하지연 조선일보 인턴기자에게 광복 직후 조선·동아 복간 당시 언론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권민정 인턴기자·고려대 체육교육4년

"일제에 희생된 신문이 세상에 나온다 김구·홍명희 등 축사·축하휘호 보내"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는 40년 8월 10일 강제폐간당한 후 첫 신문을 냈다.

이날은 마침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한 날이기도 했다. 타블로이드판(현재 신문의 절반 크기) 앞뒤 2면뿐이었지만, 복간 이틀째 신문은 1면 머리기사로 ‘김구 주석 일행 이십삼일 오후 금의환국(錦衣還國)’이라고 광복의 기쁨을 실감하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복간(復刊)을 예고하는 전단을 뿌리고, 1주일 뒤인 12월 1일 복간했다. 두 신문 모두 일제하의 극심한 탄압 끝에 폐간당한 지 5년3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김구는 ‘有志者 事竟成’(유지자 사경성·뜻을 가진 자는 일이 반드시 이뤄진다)이라는 복간축하 휘호를 조선일보에 보냈고, 동아일보 복간호에는 ‘警世木鐸’(경세목탁·세상을 깨우치는 목탁이 되라)이라 써주었다. 이승만·여운형·안재홍 등 당대 지도급 인사들은 한결같이 조선과 동아의 ‘부활’을 축하했다.

1928년부터 폐간하던 40년까지 12년간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장기 연재했던 작가 홍명희는 감격스런 어조로 조선일보 복간호에 축사를 썼다. “조선총독부 학정(虐政) 아래 희생되었던 조선일보가 다시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 다시 살아 나오는 조선일보에 축사를 부치려고 눈에 익은 조선일보 마아크 박힌 원고지를 앞에 놓고 앉으니 전날 조선일보에 투고하라고 조르던 호암(湖岩·문일평), 일성(一星·이관용), 소설란을 같이 채우던 만해(萬海·한용운) 이런 죽은 친구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생각이 감상적으로 나오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이런 감격스런 장면을 현장에서 지켜본 당시 햇병아리 기자가 민병훈(閔丙薰·88)씨. 복간 직후인 1945년 12월 조선일보 기자가 됐다. 2년간의 기자 생활 후 법조인으로 변신했던 그가 하지연 조선일보 인턴기자(동의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와 만나 그날의 기억을 되살렸다.


◇조선일보(왼쪽)와 동아일보의 복간호. 종이 질도 좋지 않고 곳곳에 글자가 뭉개져 있었지만 사람들은 두 신문의 복간으로 해방을 실감했다. 오른쪽은 김구의 조선일보 복간 축하 휘호.

―기자는 어떻게 되셨어요. 시험을 치신 건가요?

“시험은 없었어. 1943년 일본 중앙대를 졸업하고 45년 5월 귀국한 뒤 노동 징용으로 의정부에서 철로 공사하는 데서 일 했어. 내가 장남이고 식구가 많다 보니 취직은 해야겠는데, 군정청 빼면 취직할 때가 있어야지. 동경(東京)의 한국인 교수가 막 복간된 조선일보에 추천서를 써줘서 들어갔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는요?

“나는 그때 사회부 기자로 아침에 성북서와 동대문서, 그리고 법원에 들러 기삿거리를 찾았지. 정판사(精版社)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아. 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다 들통난 사건이지.

법원에 출입하면서 공판 과정을 취재했어. 묻고 대답하는 내용을 사실 그대로 보도했지. 사건이 워낙 크니까 그때 유명했던 양원일 재판장과 조재천 검사가 사건을 맡았어. 유명한 판·검사들이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는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가 관련돼있다. 미군정 발표에 따르면, 공산당 본부이자 해방일보 사옥인 조선정판사에서 900만원의 위조지폐를 만들었고 이 중 50만원이 해방일보 제작에 사용됐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좌익언론을 강력히 규제하기 시작했다. 해방일보는 1946년 5월 18일 폐간됐다.)

―어떤 식으로 취재를 했나요.

“경찰서와 법원을 돈 뒤 오후에 신문사로 들어와 3시쯤 마감을 했지. 저녁에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동료·친구들과 술을 먹는 게 일이었어. 지금도 남아있는 추탕집 ‘용금옥’에 많이 갔어.”

―신문을 인쇄할 만한 시설은 좌익신문이 먼저 장악했고, 일제 때 윤전기를 빼앗긴 조선·동아는 인쇄시설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1946~47년은 신문사뿐만 아니라 모두 먹고 살기 어려웠을 때야. 입사할 때 월급이 1000원이었고 나중에 3000원이 됐는데 인플레가 심해서 물건 값이 자꾸 올라가더라고. 경영이 아주 어려웠어. 인쇄도 다른 데서 했어. (미군정의 허가를 받아 동아일보는 경성일보, 조선일보는 매일신보 윤전기로 신문을 냈다.)

요즘처럼 돈을 빌릴 은행도 없을 때야. 내가 1년차였던 1946년 7~8월에도 두 달간 월급이 안 나와서 기자들이 ‘월급 달라’고 데모도 하고 그랬지. 방(응모) 사장이 ‘다른 데 취직 자리를 알아 보라’고 할 정도였어. 한 달 정도 신문이 못 나왔지.”

―그렇게 경영이 어렵던 조선·동아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전통이 있고 민족과 인권을 우선으로 했으니까. 조선ㆍ동아는 복간 직후부터 그래도 독자가 많았어. 숫자로야 좌익신문이 더 많았지만, 사실 보도보다는 과격한 선동과 정치구호가 더 많았어.

일제시대에는 공산주의가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 됐지만, 해방되고 나서 나라가 공산주의로 가야 되나에 대해선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았어. 그러니 좌익신문들이 처음엔 기세를 올렸지만 독자가 점점 떨어져 나갔지. 신문이란 게 세상 돌아가는 거 알려고 보는 것 아니오?”

―당시 조선·동아 기자는 몇 명쯤 됐나요?

“지금 코리아나 호텔 자리에 있던 조선일보는 건물 2층에 편집국이 있었는데, 부장들을 포함해서 스무명쯤 됐어. 동아일보도 비슷한 숫자였어(동아일보 사사(社史)에 따르면 25명).

홍종인 편집국장은 그렇게 전화를 잘해. 다른 신문사에까지 전화해서 ‘그 따위 기사가 어디 있냐’고 막 나무라. 아주 예민한 감각이 있는 분이지. 성인기씨는 논설위원을 했는데 성격이 아주 까다로웠어. 내가 그만둘 때쯤 문동표씨가 편집국장이 됐는데 아주 얌전한 신사였어. 잘못해도 혼내는 법이 없었지. 이건혁씨는 기사를 어떻게나 빨리 쓰는지, 특히 경제기사를 아주 잘 썼지.”

―당시는 ‘찬탁’과 ‘반탁’으로 좌우 대립이 심할 때였는데요?

“조선·동아는 반탁 쪽이었고, 조선인민보·해방일보 같은 좌익 신문들은 찬탁 쪽의 기사를 많이 썼어요.

그때 젊은 사람들과 지식인들은 좌익 쪽에 많이 가담했지만 민중들은 ‘빨리 독립해야 한다’ ‘반탁을 주장하는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어. 반탁과 찬탁 여론이 7대3은 됐다고 봐. 조선·동아는 반탁 노선에 적극 찬동했어요. 나라를 세우는 데 조선·동아의 힘이 상당히 있었다고 봐.”

―요즘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친일(親日) 신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때도 그런 비난을 받았나요?

“그런 건 전혀 없었어. 일제가 폐간한 신문이 해방 후 어렵게 복간되고 나니 사람들이 오히려 동정적이었지, 비난하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고. 나는 조선일보가 꿋꿋하게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게 마음에 들어요.”
/정리=이한수기자 hs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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