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초상화 그려달라 부탁… 그림 그릴 자유 찾아 월남했지"
교사로 취직하니 선생들 좌우 편갈라 싸움만
미술계도 대립심각 '좌우합작 단체'만들기도
국방부 종군화가 부단장땐 시체·탱크만 그려


노화가가 사는 서울 광화문 오피스텔 창 밖으로 인왕산이 보였다. 이젤에는 며칠 전 완성한 인왕산 그림이 놓여 있었다. “겸재 선생도 인왕산을 그렸지. 저 산은 우리나라 역사를 내려다 보고 있어.

그 역사성을 느끼려고 여기 살고 있다고.” 김병기(89) 화백. 평양서 태어나 일제강점기-광복-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화가로 살았다. 일찌감치 서양미술에 눈을 떠 1933년 도쿄로 유학갔다. 평남 평원 출신인 화가 이중섭이 친구다. 1939년 일본서 돌아온 그는 평양에서 광복을 맞이했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을 맡았지만, 1947년 월남했다.

한국전쟁 때는 종군화가단에서 활약했고 포화가 가신 뒤 서울예고,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국 현대미술의 틀을 잡았다. 해방 공간을 평양과 서울, 남과 북, 좌와 우 양쪽에서 치열하게 살아낸 김병기 화백을 미술학도 안지혜(홍익대 4년)씨와 함께 만났다.


◇서울미대 교수시절 1954~1955년 무렵 서울미대 교수들. 당시 서울 동숭동에 있던 서울미대 교사들 앞에서 촬영했다. 앞줄 왼쪽에서부터 송병돈 이순석 장발(학장) 노수현 장우성. 뒷줄 왼쪽에서부터 김종영 박갑성 김흥수 김정환 백태원 박세원 김병기 김세중씨다. 자료제공 삼성미술관 리움 자료실 한국미술기록보존소(기증자 이구열)

―광복의 순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8월 16일 평양서 일본 장교들 도망가는 열차 타고 나도 서울에 왔지. 나는 평양 유지들이 서울로 보내는 밀서를 품고 있었어. ‘서울-평양이 행동을 같이 하자’는 내용이었는데 고하 송진우 선생한테 가는 편지였지.

서울에 와보니 거리거리마다 사람들이 껴안고 울고. 그런 민족적 환희가 그 후로는 없었어. 종로에 건국준비위원회 미술본부 간판이 있어 들어가니까 이쾌대(월북화가)가 있어. 서로 광복의 기쁨을 나누고 ‘주역에서 나온 태극기의 4괘가 봉건적이니까 태극만 있는 국기를 만들자’ 그런 상의도 했지.”

―광복 후 어떤 활동을 하셨어요?

“단체를 만들었어. 작가로서는 마이너스일지 몰라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탄생했고 내가 서기장을 했어. 메이데이 투쟁을 지휘해 2주 만에 군중이 등장하는 벽화 10점을 완성했다니까. 흙 빚어가지고 노동자 상도 만들고, 평양 경찰서 앞 광장에 500호 넘는 대작도 그리고.”

―김일성도 만나보셨나요?

“김일성이 미술에서 셋, 문학에서 셋, 음악에서 셋, 이렇게 부르더라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자기 그림(초상화)도 좀 그려주고 ‘드라마(이미지)’를 만들어 달라는 거야. 그때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가짜다’, ‘일정 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항일 투쟁하던 그 김일성이 아니다’ 그런 소문이 있었거든.”

―그때 평양서는 어떤 그림을 그렸나요?

“우리 옛 그림에 소에 탄 동자가 나오잖아. 그런데 공산당은 ‘소는 민족이고 동자는 민중이다’ 그러면서 ‘동자가 왜 이리 야위었나’ 이런 식이야. 심지어 한때는 흐린 날씨도 그릴 수 없었어.

많은 중요한 화가들, 나보다 더 잘 그리는 사람들이 북한으로 갔지. 그런데 지금 역사에 누가 남았냐고. 최재덕이란 화가는 어수룩하고 두툼한 보나르식 그림을 그렸는데 그런 게 어디 북한에서 인정 받나. 아마 김일성 얼굴 똑똑히 못 그렸을 거라고.”

―이중섭 화백과 함께 일본 문화학원에 다니셨지요?

“이중섭은 참 키 크고 미남이었지. 일본 애들 앞에 애국적인 노래를 거침없이 불렀어.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는가….’ 그때 한국에 관한 노래는 다 애국적이야. ‘소나무야 소나무야’ 그 노래도 내가 이중섭한테 배웠지.”

―예술총동맹서기장까지 하시다가 왜 월남을 했습니까?

“야, 그거 싱거운 질문인데. 당연한 거 아니요. 그림의 자유가 없으니까.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예술가들이) 나랏일 해야지, 정물은 왜 그려?’ 그런 식이야. 그래서야 어떻게 예술을 하나. 사회에서 이탈된 개인이 성장해야 예술이 나오는 거야. 우리 세대 사람들은 러시아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 그런데 평양에 들어온 소련군은 우리 기대와는 어긋나는 야만인이었지. 약탈에, 강간에, 소련군 들어오면 동네서 징을 쳤는데 징 소리가 진동을 했어.”

―남한에 와보니 어땠나요?

“내가 처음 취직한 학교가 서울고등공업학교야. 그런데 선생들이 가르치지는 않고 만날 좌우로 갈려 싸움만 해. 그게 6·25 전 풍경이야. 국방부 장관 직속으로 돼 있는 이승만 계통의 한국문화연구소에 선전국장으로 들어가서 ‘우리 품으로 오라’고 북한에 보내는 방송도 하고 북에서 사람 넘어 오면 꽃다발 뿌려주고 예술제 열어주고 했지. ‘미술동맹’ 등 좌익 단체는 탄압을 받아서 지하로 들어가거나 북으로 넘어가야 했지.

내가 ‘50년 미술협회’ 만들어서 좌익, 우익을 다 모았어. 남관 김환기 다 있었는데, 이쾌대 김만형 최재덕 등은 좌익이고, 김영주 권옥연 장욱진 등은 우익이었지.

‘좌익을 왜 넣느냐’고 해서 내가 ‘그럼 이 좋은 작가들 다 북으로 보낼 거냐’고 했지. 좌·우익 합작한 ‘50년미술협회’가 7월 초하루 전시를 열기로 했거든. 한창 그림 그리고 있는데 탱크가 밀려온다는 거야. 전쟁이 터진 거지. 그 전람회가 성사됐더라면 한국 화단도 달라졌을 텐데.”

―전쟁 당시 고초를 겪지 않으셨나요?

“의용군으로 끌려 가게 됐는데 신체검사에서 사람 좋아 보이는 평양 출신 의사가 없는 병을 있다고 해서 나를 살렸지. 유엔군이 짐승처럼 여자 찾아 헤매는 것도 봤어. 적이 나를 구해주고 우리 편이 적이 되고 하던 세상이었지. 맥아더 장군 따라 평양에도 갔거든.

근데 그때 중공군 몰려온다고 해서 퇴각하는데 대동강 다리가 끊어진 거라. 그때 나중에 조선일보 주필 지낸 선우휘 장교하고 시인 이용상, 나, 이렇게 셋이서 다리 복구를 지휘했다니까.”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으셨지요?

“아버님(김찬영)이 화가야. 고희동, 김관호 다음으로 동경미술학교를 나오셨는데, 간송 전형필 선생 못지않은 고미술 수집가였어. 서울 수복 후 집에 가보니 직격탄을 맞아 고려자기가 엿처럼 녹고 있고 단계연이 가루가 돼 있었지.

부산으로 피란 갔을 때는 한 푼도 없었어. 동경서 가사 전공한 아내가 원래 도넛을 잘 만들었거든. 부산서 밀가루 구해다 불 피워서 도넛 만들고 둘이 같이 나가 팔았지.”


◇ “유학 시절 일본에서 북한산을 그렸어. 제목을‘서울’발음과 같은‘소울’(Soul?영혼)이라고 달았지….”김병기 화백이 미대생 안지혜(홍익대 4년)씨에게 60년 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주완중기자 wjjoo@chosun.com

―종군화가단 활동은 어떻게 하셨나요.

“국방부 종군화가단 단장은 이마동, 내가 부단장이었어. 군대 경험 있는 이세득이 사무장 하고. 박득순 김흥수 권옥연 장욱진 등 화가 50~60명이 있어. 문학진 서세옥 같은 젊은이, 조각하는 김세중도 있고. 전쟁터에 나가 그림 그려서 후방에서 전람회 하는 거야.

나는 누더기가 된 시체, 그물 씌워 위장한 탱크를 그렸어. 사실 ‘종군화가단’이라는 말 자체가 비예술적이거든. 어떻게 예술가가 군을 따라. 그래도 전쟁 중인데 어떻게 추상만 하고 있나. 동그라미 하나 떡 그려놓고 어쩌자는 거야. 그림에는 그 시대의 리얼리티가 있어야 한다고. 그때 국전에서 상 타는 그림 보면 맨 잘 차려 입는 여자들이 책 보는 그림이야.”

―당시 부산에 모인 문화 예술인들과 있었던 일도 들려주세요.

“1951년 봄인가. 피카소가 그린 ‘조선의 학살’을 타임지가 소개했어. 미군 기계화 부대가 벌거숭이 우리 민중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이야. 내가 보기에는 극심한 선전 미술이었어.

북한에 있던 최승희 남편 안막이 굉장히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 그걸 대서특필했지. 그래서 피카소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결별 선언을 했지. ‘굿바이 피카소’라고. 그런데 우표값이 있나.

그냥 남포동 다방에 시인, 화가들이 모인 가운데 편지를 낭독했지. 그랬더니 서울대에서 전갈이 온 거야. ‘다방에서 예술론 하지 말고 교단에서 하라’고. 그렇게 해서 서울대로 간 거지.”

―그 격변의 시대에 미술은 선생님께 무엇이었나요?

“한 시대의 정신성을 증명하는 것은 예술밖에 없어. 나보고 옛날 일을 이야기하라 해서 했지만 내게 남은 것은 사랑했던 기억밖에 없다고. 아내, 자식, 친구들….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중요한 줄은 몰랐어.”/정재연기자 whaude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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