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천국 외친 좌파노조 초반 기세
찬탁·46년총파업 실패후 민심 떠났지"


◇이찬혁 한국노동문제연구원장이 서울 영등포동 한국노총 서울지역본부에 세워져 있는‘한국노동운동 발상지(發祥地)’사적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 황정은기자

“광복 후 2년간은 전국적으로 좌우익 노조 간에 거의 매일 전쟁이 벌어졌어. 처음엔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노동자 천국’이란 구호를 내건 좌파 노조가 기세를 올렸지.

하지만 그들은 신탁통치에 찬성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잃었고, 1946년 9월 총파업에 실패한 이후로는 대세가 완전히 기울었어.”

1960년대 한국노총 위원장을 역임한 이찬혁(李贊赫·81) 한국노동문제연구원장. 일제시대 고향인 황해도 송화에서 소학교 교원을 지내던 그는 광복이 되자 1945년 10월 “나라를 위해 뭔가를 해보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 마포나루에 내렸다.

공산주의를 피해 남하한 청년들의 모임인 서북청년회에 가입, 감찰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 진영 인사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1946년 1월 열차 수리업무를 하는 서울공작소 청량리공장에 취직, 노조위원장을 맡으면서 60년간의 노동운동이 시작된다.

당시 공산당은 1945년 11월 5일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全評)를 전위대로 삼아 급격히 조직을 확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항해 우익진영은 1946년 3월 10일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을 출범시켰고, 이씨는 이후 대한노총 철도노조 간부로 전평과의 투쟁을 이끌었다.

"우익계 필요" 이승만·김구 주도로 대한노총 설립

박헌영 수배해제 등 정치구호에 총파업 반대했지

김두한, 열차운행 막는 전평계 권총 들고 물리쳐



◇피란 시절 부산서 한국전쟁 발발후 부산 피란 시절, 초량역에 마련한 대한 노총 철도연맹 사무실에서 이찬혁(뒷줄 오른쪽 세 번째) 부위원장과 당시 노조 간부들이 함께한 사진. 뒤편의 그림은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의‘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모방, 태극기를 든 여전사가 공산군에 맞서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선생님 하시던 분이 노동운동에 뛰어든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한노총은 사실상 이승만·김구 두 분이 주도해서 만들었어. 공산당이 만든 전평이 군중집회에서 큰 힘을 발휘하다 보니, 우익진영에서도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낀 거야. 난 개인적으로 두분을 존경해서 이화장(梨花莊)과 경교장(京橋莊)에도 자주 드나들었지. 그러다 우익 노조가 필요하다는 두 분의 말씀에 자청해서 철도공작창에 들어갔어.”

―정치지도자들이 노조 결성에 나설 만큼 전평의 힘이 대단했나 보군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를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강대국들의 결정이 내려지자 좌우익을 떠나 반대운동이 격렬히 일어났지.

그런데 박헌영(朴憲永)이 평양을 갔다온 뒤에 좌익진영은 찬탁으로 돌아서게 돼. 1946년 1월 3일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독립촉성시민대회가 열렸는데, 전평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이 느닷없이 ‘찬탁(贊託)’ 플래카드를 내걸자, 모여있던 시민들이 모두들 분개해서 싸움이 일어났지. 양 진영 간에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고, 시민들을 때려눕힌 공산주의자들은 동대문과 종로를 행진하며 기세등등했지.”

―광복 직후 노동운동은 정치집단의 성격이 강했군요.

“대한노총과 전평은 경영진을 상대로 한 투쟁보다는 서로 간의 주도권 다툼에 더 매달렸지. 별다른 사회조직이 없던 상황에서 합법적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조직이 노동조합이다 보니, 누가 더 많은 노조원을 동원하느냐에 따라 정치세력 간에도 우열이 갈렸지.”

―대한노총이 생겨난 뒤, 각 공장 내에서 전평 쪽 사람들과 마찰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한 공장에 좌우 두 개의 노조가 함께 공존하는 상황이라, 작업 도중에도 패싸움이 흔했지. 내가 있던 서울공작창에선 작업반들도 조장의 성향에 따라 전평계와 대한노총계로 나뉘어 있어서, 휴식시간에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우르르 몰려나가 치고받기도 했어. 모두 애초에 좌우 양 진영의 정치적 전위대로 시작한 만큼, 주도권 다툼이 치열했지.”

―노조위원장으로 계실 때 신변의 위협은 없었습니까?

“1947년에 내가 철도공작소 서울공작창 노조분회장일 때 당시 부(副)분회장이 상도동 집에서 권총암살을 당하기도 했어. 전평이 공장을 장악하고 있을 때 그쪽일을 하다가 나중에 대한노총으로 돌아섰다고 처단한거야.

범인은 끝내 안 잡혔지만, 전평 쪽에서 한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어. 나도 회사 밖에 나갈 때는 싸움 잘하는 친구들 서너 명을 보디가드로 데리고 다녔지. 종로 같은 번화가를 걷다가도 상대 눈에 띄면 곧바로 린치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1946년 9월 총파업 때 대한노총은 파업에 반대했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처음엔 우리도 총파업에 가담했어. 전평이 처우개선을 전면에 내세웠고, 우리도 이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지. 한데 9월 26일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파업전야제에 가보니, 전평측 연사가 박헌영의 수배 해제 등 정치적 구호를 들고 나오는 거야. 파업의 성격이 공산당의 정치투쟁이란 것을 깨달은 나는 철도노조원들을 이끌고 현장에서 철수해버렸지.”

―파업 막는 과정에서 충돌이 있었겠군요.

“9월 총파업은 철도로부터 시작됐어. 9월 23일 대구에서 열차운행을 막으면서, 전국의 철도망이 마비됐지. 10월 1일에는 우리 쪽에서 복구대를 파견하기로 하고 기관차를 보내려고 하는데, 전평이 이를 알고 용산역에서 2차 파업을 일으켰어.

우리쪽 기술진 6명과 20명 정도 인원이 그날 10시에 용산역에서 출발하기로 했는데, 가보니 전평 사람들이 무력으로 막더라고. 수적으로 밀려 그냥 있는데, 그때 김두한이 조직원들을 데리고 나타났어.

김두한이 선두에 서서 권총을 들고 쏘며 들어오니까, 전평 쪽은 속수무책이었지. 그런 인연으로 김두한은 후에 대한노총의 감찰 책임자를 잠깐 역임하기도 했어. 당시 감찰위원회는 노조원들을 조직해서 공산당과 싸우는 것이 주임무였거든.”

―9월 총파업 이후 대한노총이 노동운동을 장악해 나간 과정도 역시 무력이 동원됐겠군요.

“철도공작소 부산공작창은 서울공작창 전위대가 내려가서 점령했어. 당시 부산공작창은 전평계가 장악하고 있어서 열차운행을 할 수 없었지. 철도노조 분회장을 맡고 있던 나는 청년단 수백 명과 함께 기차를 타고 내려가서 한낮에 쳐들어갔어.

많은 사람들이 다쳤지만 맨손 격투라 죽은 사람은 없었지. 철도공작창뿐 아니라, 우리 청년단은 안동·순천·광주 등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평계 공장이라고 알려진 곳을 접수해나갔지. 대구에 있던 가타쿠라(片倉) 방직회사 같은 곳은 전평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곳인데, 철도전위대가 집단습격을 해서 전평 간판을 떼내고 대한노총 간판을 붙이기도 했지.”

―대한노총이 장악하면 전평 소속 노조원들은 해고되는 겁니까?

“노조 집행부들은 골수 공산당원이라 당연히 회사를 떠났고, 나머지 일반 노조원들은 전향을 조건으로 대한노총에 가입시켰어. 당시에야 노조에 가입하지 않으면 회사에 붙어있을 수 없어서 이름만 올려놓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우리 전위대가 손쉽게 공장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군대식 훈련까지 받은 수백 명의 장정들이 들이닥치면 겁부터 먹게 되니까.”

―수백 명의 철도전위대가 특별열차를 타고 전국을 순회했다는 것은 당시 미군정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9월 총파업 이전까지만 해도 미군정은 양대 노총에 대해 중립적이었어. 미군정이 전평의 위험성을 깨달은 것은 9월 총파업과 이어진 10월 대구폭동 이후였어. 우리가 파업 진압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군정의 묵인이 있어 가능했던 거야.”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노총의 사이는 어땠나요?

“이 박사는 대한노총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어. 정부 수립에 공무원의 노조 가입을 금지하는 국가공무원법이 생기자 당시 허정 교통부장관이 철도노조를 없애려 했지. 그러자 이 박사가 ‘애국애족(愛國愛族)하는 철도노조를 왜 없애느냐’며 막아준 일도 있어.

장기집권을 하면서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과오도 있지만, 이 박사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민족의 지도자였어. 대통령까지 지내신 분이지만, 이화장에 가보면 양복장이 없어서 박스에 옷을 보관할 정도로 청렴한 분이었지.”

―노동계 원로로서 현재의 노동운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쉬운 점이 많아. 파업은 경제와 산업 여건을 감안해서 최후의 수단으로 써야 하는데 요즘 노동운동은 일단 파업부터 하는 것 같아. 건국 과정에서 선배들이 흘린 피와 땀을 생각해서 후배들도 나라 발전시키는 일에 앞장섰으면 해.” /최현묵기자 sean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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