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최고 직장에 근무하는 이인숙(가명)씨의 아버지는 6.25 직후 남파된 대남공작원이다. 한번도 아버지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남파된 덕분에 북한사회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그녀는 어머니의 병환을 걱정하며 절친한 친구(탈북자)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당에서는 대남공작원 가족들을 잘 돌봐주다가도 잡혀서 변절이라도 하면 바로 정치범수용소로 보낸대.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수십년간 불안 속에 살다보니 병이 났어. 결혼하고 몇달만에 헤어진 남편이라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대. 어머니는 이인모 노인이 수십년간 행방불명됐다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는 너무 놀라 며칠이고 밤잠을 자지 못했어. 아버지는 어떻게 될까 싶어서. 차라리 사망 통지를 받으면 변절 걱정은 안 해도 될텐데."

외국문인쇄공장에서 지배인을 하다가 95년 사망한 김관해의 경우는 부모가 모두 남파돼 고아처럼 자랐다. ‘공작원의 자녀는 당이 맡아 키운다’는 방침에 따라 만경대혁명학원와 김책공대를 졸업했으나 능력 미달로 인쇄공장 노동자로 배치됐다. 그는 항상 빛바랜 부모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며 동료들에게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공작활동 도중 사망하면서 일약 승진하여 편한 삶을 누렸다. 외국에 나가 고급 인쇄기자재를 들여놓는 중책을 맡았으나, 일을 잘못 처리해 외화를 낭비하기도 했지만 혁명유자녀급인 그에게 책임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작년 9월 비전향장기수 송환 즈음, 북한은 평양방송과 민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 방송을 통해 이들의 가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여러 차례 소개했다. 송환된 장기수 유연철씨의 자녀들은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연극영화대학 등을 졸업해 대학교수나 예능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했고, 김인서씨의 큰 딸도 평양외국어대 교수로 일하고 있는 등 아버지 없이도 당의 배려로 잘 성장했다고 선전했다. "영웅" 칭호를 받는 비전향장기수의 가족들이야말로 최고로 대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남파된 공작원과 북에 남은 그의 가족들은 일평생 불가분의 관계속에 살아간다. 북한에서 대남공작이란 "통일애국사업" 또는 "남조선혁명사업"으로 미화돼 있으므로 그 가족들도 "우리 아버지는 혁명가"라는 식으로 주위에 은근히 자랑하거나 굳이 숨기지 않는다. 이때문에 북한에서 공작원 파견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돼 있다.

직장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동료가 있으면 대체로 추방 아니면 대남사업 차출로 추측하게 된다. 북한의 공작원은 평범한 전문직 종사자중에서도 선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때는 주위에서 눈치챌 수 없도록 일부러 "절도" 같은 죄를 짓게 해 소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족들이 무사하고, 오히려 살림이 윤택해지면 주위에서는 ‘혁명가 가족’이 탄생한 걸로 알게 된다.

북한사람들은 TV에서 남한의 데모장면이 나오면 "우리 공작대가 이남에 가서 조직사업을 단단히 잘 했구나"라며 감탄할 정도로 대남공작을 당연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북에 남은 가족들의 애환은 눈물겨운 것이다. 공작원의 아내는 남편이 사망한 경우에도 "혁명가의 아내"로서 재혼은 꿈도 꿀 수 없다.

남한에 자주 드나드는 공작원을 북한에서는 "피스톤"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북한에 있을 때도 가족을 거의 만날 수가 없다. 남파됐다 돌아와도 이들은 전국 각지에 있는 "대남연락소"에 머문다. 어쩌다가 어렵게 가족을 만날 기회가 오면 "달러"라도 몇 푼 더 쥐어 주는 것이 이들의 바람이다. 고정간첩으로 남한에 정착해 사는 공작원의 가족은 평생을 더욱 불안 속에 살아야 한다. 평생 얼굴 한번 보기 어려운 가장의 행동에 따라 언제 ‘추방령’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사망통지서"를 기다리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김미영기자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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