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떼를 퇴치한 피리 부는 소년의 전설로 유명한 독일의 니더작센주(주) 하멜른에서 만난 울리히 잠 전(전) 동·서독 정상회담 실무단장은 키가 190cm를 넘는 거구였다. 인터뷰를 위해 82세의 나이에도 정장(정장)을 하고 나온 그는 “한국에서 멀리까지 나를 만나러 와 줘서 영광”이라며 밝게 웃었다. 잠 전 단장은 오른쪽 귀에 보청기를 끼고, 지팡이를 짚을 정도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30년 전의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회담장에서 동독의 도청을 의식했던 서독 대표단 모습 등 정상회담의 주요 장면들을 비교적 분명한 어조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70년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이 제의한 정상회담을 수락했을 때 독일 내부의 분위기는 어떠했나? 야당인 기민당은 달가워하지 않았다는데.

“서독 주민들은 대부분 회담을 환영하는 편이었다. 정상회담으로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기민당은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자체를 반대했기에 회담에 반대했다. 에어푸르트 회담에서 별 성과가 없자, 기민당은 ‘처음부터 안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서독 주민들도 회담 후 기대에 어긋나자 실망하는 분위기였다. ”

―남북 정상회담에서는 ‘상봉’과 ‘회담’이 분리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70년 회담 당시 서독의 브란트 총리는 동독의 울브리히트 국가평의회 의장과 대등한 권한을 갖고 있었고, 슈토프 총리는 별로 실권이 없었다. 이처럼 격이 맞지 않는 문제로 서독 내부에서 논란은 없었나?

“정치적으로 볼 때 브란트 총리와 울브리히트 의장은 같은 반열이었다. 슈토프 총리는 실권이 없었다. 그러나 브란트와 슈토프는 직함이 정부 수반(head of government)이라는 점에서 같았다. 울브리히트는 서독의 하이네만 대통령처럼 국가수반(head of state)이었기에 브란트 총리가 울브리히트와 회담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없었다. ”

―정상회담 당시 서로 체제가 다르기에 경호문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합의했었나?

“우리는 경호문제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동독이 정상회담을 원해서 하는 것이므로 동독정부가 이 문제에 무척 신경을 썼다. 그러나 우리는 회담장 내 우리 대표단에 대한 도청문제에 대해 크게 신경을 썼다. ”

―동독이 정상회담장의 서독 대표단 사무실을 도청했다는 말인가? 증거가 있나?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상회담장의 우리측 사무실이 동독에 도청당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회담을 준비했다. 도청을 막기 위해 우리는 정상회담에서 거론될 모든 문서에 번호를 붙여 놓았다. 정상회담 당일 우리측 대표단 사무실에서는 아무도 문서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번호만 불렀다. 예를 들어 ‘문서 5번은 생략하자, 문서 3번은 거론하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공산주의 국가는 항상 도청을 한다. 당시 우리는 동독이 도청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잠 단장은 당시 도청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했던 듯 “양국 정상이 단독회담을 한 작은 방에도 틀림없이 도청장치가 돼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정상회담에서 브란트와 슈토프는 각자 자기 입장만을 개진했다. 아무런 타협은 없었다. 이런 회담이 어떤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나?

“(고개를 흔들며)그래도 이 회담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양국 정상이 처음으로 만나서 이야기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다른 후속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연 것이다. 시작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회담이 성공적이었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

―정상회담 당시 공동성명 문안을 만드는 데 직접 참여했는데….

“오후 5시쯤 확대정상회담이 끝난 후 나는 동독측 파트너와 공동성명 문안을 논의했다. 양측이 공동성명에 넣기를 원하는 부분에 대해 서로 ‘불가(불가)’를 주장해 대부분 삭제했다. 동독측 파트너가 논의된 문안을 가지고 나가더니 1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에어푸르트 근교에 있던 울브리히트 국가평의회 의장에게 허락을 받으러 간 것이었다. 그 안을 가지고 양측 총리가 다시 회담을 가졌다. ”

―한국 국민들이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커, 회담 결과에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회담 결과가 기대에 어긋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미래를 보고 기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1989년 갑자기 동독 주민들이 나와서 시위를 하기 시작했으며 1년 후 통일이 됐다.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북한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

―정상회담에 임하는 한국 정부의 자세에 대해 조언한다면.

“나는 동독과 공식·비공식적으로 많이 토론하면서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어느 한쪽이 우월하다는 입장에서 대하면 안 된다. 똑같은 입장에서 토론해야 한다. 나는 공산주의를 저주하지만, 회담에서는 같은 입장에서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

/하멜른(독일)=이하원기자 may2@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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