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을 예술영화로 형상한 선구자는 고(故) 리종순(1997.11 사망) 영화문학(시나리오) 작가이다.

그는 김 주석을 주인공으로 처음 형상한 ‘수령형상 예술영화’인 「조선의 별」(1∼10부. 1980∼87)의 시나리오와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가 제일 좋아하는 ‘동지애의노래’(1980)의 가사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예술영화 「조선의 별」은 김 주석의 활동을 형상함에 있어서 사상성만 강조됐던 기존의 문예작품과 달리 예술성이 상당히 가미되고 특히 김 주석의 이미지를 “평범한 인간과 탁월한 지도자의 적절한 결합으로 표현”함으로써 최고의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또 그가 처음 쓴 가사인 「동지애의 노래」는 김 총비서로부터 “내가 제일 사랑하는 노래다. 철학적 깊이가 있고 생활적인 시어로 잘 엮어졌다”고 평가받고 ‘명가사의 본보기’로 내세워진 노래다.

그는 김 주석과 김 총비서 모두의 각별한 신임속에서 북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지난 66년부터 김 총비서와 인연을 맺었으며 김 총비서가 그의 집을 여러차례 집을 방문했을뿐 아니라 무려 1천여회에 걸쳐 직접 만나고 전화 통화한 사실만으로도 이들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99년 발행된 북한 「조선말대사전」(제8권)에는 리 작가의 문학인생이 소개돼 있으며 평양방송도 지난 3월 23일 30여년에 걸친 리 작가와 김 총비서의 각별한 인연 등을 상세히 보도했다.

평양방송에 따르면 함경남도 북청군 지만리의 빈농가정에서 출생한 리 작가는어릴 때부터 수재로 소문났지만 가난한 탓에 간신히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우연한 기회에 리 작가의 재능을 알아본 일본인 자선가의 눈에 띄어 그는 서울상업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그는 상업보다는 문학세계에 심취됐으며 일본인 교사의 특별지도를 받으면서 문학공부에 전념했다.

그 와중에 반일투쟁을 하다가 서울 서대문감옥에 갇혀있던 사촌형을 만나게 되면서 점차 반일의식을 키우게 됐으며 결국 졸업 후에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고향에 내려가 농사일을 하면서 반일지하운동에 참가했다.

8.15 해방 직후에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함흥시 위원장을, 1948년에는 조선민주청년동맹(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전신) 기관지 ‘민주청년’(청년전위 전신)의 문화부장, 6.25전쟁 때에는 내무성예술단(인민군협주단 전신) 정치부단장 등을 역임했다.

종전 후에는 개성시립극장 작가, 지난 60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예술부총장, 62년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주필, 63년 조선영화인동맹 중앙위원장, 72년 백두산창작단부단장 등으로 활약했다.

리 작가는 이러한 화려한 직책보다는 시나리오로 이름을 빛냈다.

희곡 「다시는 이렇게 살 수 없다」(1954)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희곡 「신해방지구에서」(1956), 시나리오 「준령을 넘어서」(1957)을 잇따라 발표했으며 60년대부터 김 주석의 항일투쟁을 소재로한 작품을 본격적으로 창작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 주석의 체제에 대항하는 이른바 ‘종파분자’들의 책동이 극심했던 지난60년 김 주석의 항일투쟁을 형상한 희곡 「조국산천에 안개 개인다」를 내놓아 큰주목을 받았다. 그는 작품창작의 진실성을 보장하기 위해 항일빨치산들과 함께 중국등의 현지를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이어 시나리오 「벗들이여 우리와 함께 가자」(1960), 「두만강」(1960), 「축배」(1963), 「붉은 꽃」(1963), 「온정령」(1963), 「한 지대장의 이야기」(1966),「사회주의 조국을 찾은 영수와 영옥이」(1970) 등을 잇따라 창작했는 데, 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북한 문학사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또 「조선의 별」과 함께 김 주석의 항일투쟁과 영도력을 찬양한 예술영화「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1980), 「백두산」(1980), 「잊을 수 없는 나날에」(1987)을 연속 써냈다.

그 공로로 리 작가는 ‘김일성상’(1975), ‘노력영웅’(1981), ‘김일성훈장’(1987)등 많은 명예칭호와 훈장을 받았다.

김 총비서는 리 작가의 건강과 일가족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배려했다.

리 작가의 시력이 나빠지자 외국의 안과박사를 초청해 이식수술을 하도록 조치했으며 김 주석 사망 직후 ‘대국상’이 치러지는 와중에서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그를 위해 100여일간의 집중치료기간을 설정해 소생시켰다.

그가 사망했을 때에는 “정말 아까운 작가를 잃었다”고 못내 애석해하면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치토록 지시했다.

김 총비서는 이에 앞서 그의 부인이 불치병으로 앓을 때에는 “중병으로 고통을겪고 있는 리종순 동무 부인의 불행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면서 외국에서 귀한 약재를 구해다 치료토록 했다.

현재 리 작가의 3남1녀 중 차남 주호씨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출가로, 삼남 주민씨는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시나리오작가로 각각 활약하고 있다./연합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