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미국에서 ‘북한 핵이 자위(自衛) 수단이라고 한 것은 일리가 있다’는 발언을 하고, 16일 정부의 핵심 당국자가 이를 적극 옹호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한반도 비핵화 남북공동선언’이다.

노 대통령에 이어 핵심 당국자도 북한 핵 보유를 납득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그동안 북한의 핵무장을 견제해오던 유일한 남북한 합의가 사문화(死文化)될 위기에 처했다는 판단에서다.

우리 정부가 그동안 북한의 핵 보유를 비판하는 중요 근거로 삼아온 이 선언은 힘든 협상을 거쳐 1991년 말 체결된 후, 92년 2월 발효됐다. 이 선언의 제3항에는 “남과 북은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고 명시돼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선언에 ‘우라늄 농축’ 시설 보유 금지를 명시해 두었기에 우리 정부는 그동안 북한에 대해 고농축 우라늄(HEU)에 의한 핵무기 계획을 포기하라고 촉구할 수 있었다. 북핵 6자회담에 참가하는 다른 국가들도 이 합의를 원용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과 정부 핵심 당국자가 잇달아 북한의 핵 보유를 이해한다는 듯한 발언을 함으로써, 사실상 이 선언은 앞으로 우리가 활용하기 힘들게 됐다는 지적이 많다.

앞으로 있게 될 남북회담과 북핵 6자회담에서 비핵화공동선언이 거론될 때마다 북한이 “노 대통령을 비롯한 최고 수뇌부가 우리의 핵 보유가 합리적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라며 반박할 것을 상상하는 것은 이제 어렵지 않게 됐다.

현 정권이 몇 마디 말로써, 그동안 북한을 구속해 왔던 남북한 합의를 무효화한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정부의 실무관계자들이 노 대통령의 LA 연설을 옹호하려고 애를 쓰다가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말문이 탁 막히는 현실을 노 대통령이 과연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이하원·정치부 기자 may2@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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