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한 고위간부가 암세포가 간을 잠식하고 폐까지 파들어오는 상황 속에서도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며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 매달리다 북한측으로부터 “하자”는 연락이 온 이틀 뒤에 사표를 던지고 병원으로 실려간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26일자로 현직에서 물러난 국가정보원 엄익준(엄익준·57·사진) 2차장. 대학을 졸업하고 34년 평생을 국가정보기관에만 근무해온 그는 특히 북한 정보분야에 오랫동안 종사, 이 분야 1인자로 통하는 인물이다. 94년 남북정상회담 실무접촉 때 일을 하느라 하나밖에 없는 딸 결혼식까지 참석지 않았을 만큼 직업의식이 투철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간암 말기 진단을 받은 것은 지난해 10월. 그러나 그는 이를 주변에 숨기고 항암제를 복용해 가며 일을 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올 3월 들어서는 병세가 악화됐으나 “몇개월이라도 더 살려면 그래서는 안된다”는 의사의 권고도 물리치고 일에만 몰두했다.

국내 정보를 총괄 책임지는 자리여서 업무가 많았고, 정상회담과 관련된 모종의 임무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엄 차장은 4월6일 북한으로부터 정상회담 성사 연락이 오자 이틀 뒤(8일) “이제 끝났다”는 말과 함께 사표를 냈고, 10일에는 전 직원 앞으로 원내 E-메일을 띄워 ‘마지막 말’을 남겼다. “국가정보기관 직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사명감이며, 개인 보다는 전체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김인구기자 ginko@chosun.com

/신정록기자 jr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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