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에 다녀 온 남한 사람은 약 6000명에 달한다. 이들중 상당수는 북한 당국이 미리 정해놓은 일정에 따라 김일성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을 방문했다. 그럼에도 이곳의 방문 절차와 내부 시설 등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음은 지난 1월 방북했던 한 인사의 금수산기념궁전 방문기다./편집자



◀금수산기념궁전 2층 중앙방 가운데에 미라로 보존되어 놓여 있는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의 시신 모습.
중국 베이징공항을 출발, 2시간 가량 걸려서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했다. 날은 저물어 어둑어둑했다. 게다가 폭설에다 100년만의 추위까지 몰아닥쳐 몸은 저절로 움츠러 들었다.

일행과 함께 공항에 대기해 있던 버스에 오르자 중구역 만수대로 향했다. 1972년 김일성의 환갑 기념으로 세워진 20m 높이의 대형 동상에 참배시키려는 것이었다. 전력난을 반영하듯 만수대로 향하는 길은 어두웠으나 동상이 자리한 곳은 주위에 켜놓은 전등 때문에 제법 밝았다. 일행 대부분은 베이징에서부터 동행한 북측 관계자가 준비해온 꽃다발 두 개를 김일성 동상에 헌화하고 간단한 목례로 참배했다. 나는 뒤로 물러서 있었지만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북측은 나중에 이 꽃 값을 방문단에 요구해 받아갔다.



◀1977년 김일성의 65회 생일을 맞아 평양시 금수산(모란봉 별칭) 기슭에 완공된 금수산기념궁전 전경.
만수대에서 돌아와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연료난이 심각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첫날 밤을 춥게 보낼 각오를 했으나 의외로 객실마다 전기 히터를 두 개씩이나 비치, 추운 줄 몰랐다.

다음날 금수산기념궁전에 도착한 것은 아침 9시30분쯤이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3층 건물 앞 왼쪽에 마련된 길다란 임시 회랑 앞에는 농한기를 이용해 지방에서 올라 온 것으로 보이는 북한 주민들이 입장 순서를 기다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줄 서 있었다. 아낙네들은 살색 스타킹과 중국식 맹꽁이 신발을 신고 있었고 두터운 오바를 뒤집어 쓰듯 입고 있었다.

일행은 주민들을 제치고 먼저 임시 회랑에 들어섰으나 금수산기념궁전 본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까지는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외투를 벗어야 했고 라이터 등 일체의 소지품을 안내원에게 맡겼는데도 X-선 검색기로 구석구석 ‘몸수색’을 당했다. 나중에는 물끼가 촉촉히 배어 있는 카펫을 걸으며 신발의 먼지까지 씻어내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금수산기념궁전 본관 1층으로 연결된 평면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는 매우 느렸다. 방문객들이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려고 그런 것으로 생각됐다.

본관 1층의 서쪽 입구로 들어서자 2층 높이의 뒷짐진 김일성 입상과 마주쳤다. 북측 안내 책임자는 45˚로 동상에 절했다. 일행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때 일행에서 밀려 북한주민들 사이에 끼여 있어 동상에 절은 하지 않았다.

일행 5명에 한명씩 배치돼 있던 안내원들이 경건하게 절을 하고 있는데다 따라하지 않으면 공연히 골치아픈 일이 생길 것같아 일행들은 절을 하는 것 같았다.

김일성의 시신이 미라로 보존되어 있는 곳은 2층 중앙방이었다. 방 가운데 투명한 유리 안에 안치된 김일성 시신은 주변 밑에서 비치고 있는 은은한 백열등 빛을 받고 있었다. 얼굴은 화장을 진하게 한 탓에 매우 희었고 입술은 붉었다. 투명 유리 속을 진공 상태로 만들기 위해 주기적으로 공기를 빼내기 때문인지 그의 몸은 부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마오쩌뚱과 호치민의 시신을 보았을 때도 실제 몸보다 부풀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은은하면서도 장중하게 울려퍼지는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이란 곡은 경건한 분위기를 고취하고 있었다.

왼편 입구를 통해 방에 들어선 우리 일행은 시신의 서쪽 앞에 섰다. 안내원들이 먼저 90˚로 깍듯하게 절을 했다. 그러자 일행 대부분이 따라 했다.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거나 간단하게 목례하거나 또는 행렬 중간에 그냥 서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같은 ‘어색하고 두려운’ 참배는 시신의 남쪽과 동쪽에서 각각 한 차례씩 더 이루어졌다. 일행 중 다수가 두려움과 호기심도 작용했겠지만 방북하기 전 우리 정부가 ‘북측 요구를 웬만하면 따라주라’는 지침을 준 탓에 순순히 분위기에 따르는 것 같았다.

일행은 시신 참배 후 세 개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울음 홀’이었다. 이들 세 방엔 각각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북한 주민들과 남한 주민들, 백인ㆍ흑인을 포함한 전세계 사람들의 ‘망연자실한’ 모습들이 벽에 부조(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꽃무늬 한복을 차려 입은 40~50대 안내원들이 방문객들을 10명 단위로 맡아 김일성 사망 당시의 ‘전 세계 인민들의 애통한 반응’에 대한 설명을 했다. 장중한 분위기 속에서 안내원의 설명은 또렷했다. 방 가운데는 김일성이 생전에 사용하던 자동차와 전용 기차 객실 등 유품이 전시돼 있었다.

유품 관람을 마지막으로 본관 1층 서쪽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1시간 반에 걸친 그로테스크한 방문이었다.

/정리=이교관기자 haeda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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