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간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평화공존을 제도화하여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려는 대북한 긴장완화 정책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온 국민이 바라는 바이고, 주변국 모두가 지지하는 정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한사회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존을 넘어 남북한간의 통일을 추구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통일은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온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체제를 포기하고 북한의 전체주의 이념과 체제를 수용하거나, 반대로 북한이 민주화되거나 해야만 가능한데 그 어느 쪽도 아닌 상태에서 통일을 추진한다면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작년 6월의 남북 공동선언은 남북한간의 서로 다른 속셈이 담긴 동상이몽의 작품이다. 한국은 북한을 민주화해나가려는 속셈으로, 북한은 반대로 한국을 연방이라는 굴레 속으로 끌어들여 북한체제에 동화시켜 나가겠다는 속셈에서 통일노력을 함께 펴나가기로 합의한 것이다. 한국은 당장에 통일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을 감안하여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마치 유럽 14개국이 구주연합을 만들어 공동이익을 추구하듯이 남북연합, 즉 ‘한민족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홍콩과 대만을 흡수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해낸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연방안을 본떠 현존 남북한 정부 위에 하나의 ‘고려연방’을 창설하여 이를 장악함으로써 한국을 흡수한다는 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연합’과 ‘고려연방’안은 이렇듯 법적 성격도, 그리고 숨겨진 의도도 다르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이 두 가지 안의 공통점을 토대로 통일 방안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하니 국민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국가간의 관계개선에는 두 단계가 있다. 적대(敵對)관계를 청산하고 정상관계를 회복하는 단계를 데탕트라 하고, 정상관계에서 출발하여 친밀한 동맹관계를 만드는 단계를 앙탕트라 한다. 데탕트는 현존질서(status-quo)를 존중하고 안정시키는 것인 데 반하여, 앙탕트는 현존질서를 깨고 새 질서를 만드는 일이 된다. 그래서 주변국들은 데탕트 정책을 평화증진 노력으로 보고 축복과 지지를 보내나, 앙탕트는 기존 평화질서의 위협 요소로 받아들이고 경계한다.
한국과 이념을 같이해온 미국은 한국의 이념과 체제를 위협하는 적으로부터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한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미국은 그래서 한국체제의 가장 큰 위협세력인 북한의 위협을 줄이려는 한국정부의 대북한 데탕트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부시 정부도 한국의 대북 ‘인게이지먼트’ 정책, 즉 대화를 위한 접촉 정책은 적극 지지한다고 확인하고 있다. 문제는 대북 긴장완화 단계를 넘어서는 한국정부의 통일정책 부분이다. 미국은 북한이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음이 입증될 때까지 한국이 앙탕트 정책을 자제해줄 것을 이번 양국 정상회담에서 강력히 희망했다. 이념체제의 상극성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성급한 대북 앙탕트 정책, 특히 일방적인 유화정책은 동북 아시아의 강대국간의 현존 균형질서를 흔드는 위험한 정책이라 보고 이를 경계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 결과의 해석에서 혼선을 빚은 데는 ‘인게이지먼트’라는 단어의 잘못된 번역도 한몫 했다. 인게이지먼트는 적대국과 대화와 협상을 하기 위한 직접 통로를 만들려고 없던 관계를 새로 설정한다는 뜻을 가진 중립적 개념으로, 포용이나 유화의 뜻은 전혀 없다. 미국은 우리의 인게이지먼트 정책을 지지한다고 했지, 포용정책을 지지한다고 하지 않았다.
평화와 통일은 우리 민족의 염원이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이 서로 상충할 때는 평화를 우선 시키고 통일을 뒤로 미루어야 한다. 평화는 통일의 초석이 되지만 평화를 희생한 통일은 민족 자멸의 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정부는 통일보다 평화정착을 앞세우는 정책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그래야 갈라진 국론의 재통일도 기할 수 있고 껄끄러워진 한·미 관계도 바로잡을 수 있다.
/서강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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