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5차 장관급회담을 회담 시작 불과 몇시간 전에 전화통지문을 보내 일방적으로 연기한 것은 6·15 이후 남북관계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가장 심각한 징후를 지닌 것임에 틀림없다.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한」 결정이라는 게 북한측 설명이지만 장관급회담이 국제적 회담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북한측의 그런 설명과 태도는 무책임하고 무례하기까지 하지만 사인의 민감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번 사태는 우리 정부가 그동안 취해온 대북자세에 기인하는 자업자득일 수도 있다.

이번 장관급회담은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부시행정부 등장 등 변화된 환경에서 행해지는 첫 회담일 뿐더러 우리로서도 올 들어 첫 공식접촉 무대였다. 또 북한이 최근 들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높이기 위해 서방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 수립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가운데 열리는 회담이었다. 이번 장관급회담을 일방적으로 연기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북한 태도는 국제적 규범과 관행을 무시한 돌출행동으로 일관했다. 회담을 연기할 사정이 있으면 당연히 사전에 통보해 상대측의 양해를 구해야 하며, 또 연기이유도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도리다. 대표단 구성에 변경사항이 있으면 그것도 사전에 통보하는 것이 예의다.

북한의 이런 행동의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북한 자체에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현 정부의 협상태도에도 문제가 많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 정부가 북한과의 협상에서 보여준 태도는 「좋은 게 좋다」는 식이었다. 북한이 일방적인 행동을 해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북한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해도 애써 좋게만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 북한의 일방적 장관급회담 연기에 대해서도 『심각한 사안이 아니다』 『북한 내부사정 때문일 것이다』 『곧 회담이 열릴 것이다』 『북한대표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일 것이다』 등 어떻게든지 좋게만 보려 하고 있다.

결국 북한은 부시의 단호하고 강경한 대응전략을 접하고서 자체의 대남·대미 전략을 새로이 점검할 필요를 느꼈을 수도 있다. 아울러 앞으로 「DJ식햇볕」의 전제 또한 만만찮은 우여곡절을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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