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시절 동독은 서독에 크게 해코지를 한 게 별로 없습니다. 전쟁은 고사하고, 여객기를 납치하거나 폭파한 적도 없습니다. 스파이를 보내 총리 수행비서로까지 만든 ‘기욤 사건’이 그나마 충격적인 것이었지요.

동독은 서독에 대해 철저하게 방어적이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을 쌓은 것도 체제유지를 위해 나름대로 불가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연간 수백만 명의 서독인에게 동독 방문을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통일후 동독 지도자들은 법정에 서야 했습니다. 정치재판이라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적용할 법률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당시의 동독 법률에 저촉되지 않았고, 더구나 그것은 고도의 통치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실정법상 마땅한 처벌 조항을 찾지 못하자 그들에게는 자연법적 성격이 짙은 국제인권조약이 적용되기도 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에게 사격 명령을 내린 사실이었습니다. 국경경비대가 탈출자들에게 그냥 위협 사격을 했느냐, 사살 의도를 갖고 정조준 사격을 했느냐를 놓고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정조준이었다는 판단에 따라 경비병들도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동독 지도부에 대한 서독의 처벌 의지는 단호했습니다. 모스크바로 피신했던 호네커 공산당서기장을 기어히 송환해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가 간암으로 시한부 생명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확인되고 나서야 인도적 차원에서 딸이 살고 있던 칠레로의 망명을 허용했습니다.

호네커는 김일성과 아주 가까웠습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 있던 호네커가 구원을 요청하자 비행기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동갑이었던 두 사람은 묘하게도 사망도 같은 해에 했습니다.

동독 지도부의 운명은 북한이 개혁개방에 더욱 강한 거부감을 갖게되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호네커의 운명은 “역사는 늦게 오는 자를 처벌한다”는 격언을 끝까지 외면한 탓이 컸습니다. 늦기 전에 개혁개방하라는 고르바초프의 충고를 그는 묵살한 것입니다.

호네커를 비롯한 동독지도부를 처벌하라는 요구는 서독인들보다 동독인들에게서 더욱 강했습니다. 직접적인 피해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주민들이 현재의 북한지도부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를 엿보시려면 NKchosun.com의 ‘탈북인동호회’ 방으로 와 보십시오. ‘북한체제를 등진 사람들이니까...’하는 선입견만 버린다면 진실은 봄 벌판의 들꽃처럼 널려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도덕적 책임과 법률적 책임을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느낄 것입니다.

/김현호 통한문제연구소장 h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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