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의 비중은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참석 여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김 주석이나 김 국방위원장이 직접 참석했다면 상당히 의미 있는 행사로 간주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일단 그다지 중요한 행사는 아니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3·1절 행사도 예외는 아니다.

광복 이후 북한에서는 거의 매년 3·1절 행사가 열리고 있다. 5, 10주년의 이른바 ‘꺾어지는 해’에는 행사의 규모가 다소 커지기도 하지만 그 성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분단 반세기 이상을 지나오면서 김 주석이 3·1절 행사에 참석한 것은 한 번뿐이다. 물론 김정일 위원장이 3·1절 행사에 참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평양에서 열린 "3·1운동 27주년 평안남도 경축대회"에 김 주석이 참석해 연설을 했는데 이것이 그가 참석한 처음이자 마지막 3·1절 행사였다.

그런데 이날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행사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고가 있었다. 김 주석이 연단에 올라 연설하는 도중 그를 향해 수류탄이 날아든 것이다. 신병경호를 맡은 소련군 경비대장이 기민하게 처리해 김 주석의 신변에 큰 변고는 없었지만 경비대장은 한쪽 손을 잃는 부상을 면하지는 못했다.

이날 발생한 수류탄 투척사건은 남한에서 파견된 임정계 비밀결사대인 백의사(白衣社)에 저질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의 직함을 가지고 있던 김 주석을 제거하고 북한내 반탁운동에 불을 지피기 위해 비밀리에 입북했으나 뜻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신탁통치라는 화두가 광복 정국의 "태풍의 눈"으로 등장한 가운데 발생한 이 사건은 이념과 정쟁으로 얼룩진 당시의 복잡한 정치정세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 기록되고 있다.

김 주석의 생명을 구한 야코프 노비첸코라는 이름의 경비대장은 부상이 치유되자 그해 12월 만 8년간의 군생활을 접고 상이군인으로 제대돼 고향인 노보시비리스크 트라보노에로 돌아갔다. 그는 고향에서 수매기관 간부와 인공부화장 지배인을 지내다가 만년에는 젖소와 말을 기르며 연로보장을 받아 생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84년 5월 당·정대표단을 이끌고 소련·동유럽 순방길에 올랐던 김 주석은 모스크바로 가던 도중 노보시비리스크역에서 노비첸코를 불러 생명을 구해준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며칠 뒤 북한은 노비첸코에게 노력영웅 칭호와 금별메달,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했다. 러시아인으로서 북한 영웅칭호를 받은 것은 노비첸코가 처음이었다.

김 주석은 생전에 외국인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두 사람에 대해 자주 언급 하곤 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노비첸코였다. 다른 한 사람은 김 주석의 만주 무송제1우급소학교 시절 급우인 장울화(張蔚華)라는 중국인이다. 그는 무송 일대 부호의 아들로 평소 김 주석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으며 김 주석과 연계된 지하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극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는 인물이다.

김 주석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1993)에서 무려 65쪽이나 할애해 각별했던 그와의 관계를 소상히 회고한 바 있다. 그의 55주기를 맞이한 1992년 10월에는 자신의 필적이 담긴 기념비를 무송에 있는 장울화의 묘에 세우기도 했다. 김 주석은 회고록에서 사랑과 과학, 혁명에는 국경이 없다면서 노비첸코와 장울화를 "혁명을 위해 목숨 바친 국제주의자의 세계적 전형"으로 치켜세웠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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