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당 비서급 인사가 지난달 설(1월24일) 직전 극비리에 방한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관련한 협의를 하고 돌아갔으며, 그 후 우리측 통일부 과장급 실무자가 후속 협의를 위해 메시지를 갖고 방북하는 등 김 위원장 답방과 관련한 남북한 간의 비밀 접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25일 확인됐다. 정부는 그동안 김 위원장의 답방 문제와 관련한 남북한간 접촉은 없다고 밝혀왔다.

정부 관계자들과 소식통들은 이 북한측 ‘특사’가 서울을 극비 방문했을 때 임동원 국가정보원장 등과 2차 남북한 정상회담의 정치, 경제, 군사 부문 의제들과 김 위원장에 대한 환영 및 경호 문제 등을 협의하고 돌아갔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주목받고 있는 인사는 김용순 대남 담당 비서로 그는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상하이 방문(1월15일) 때와 신의주 현지 시찰(1월21일) 때 수행단에서 빠졌다가, 1월31일 평양에서 개최된 김책 사망 50주년 추모회 때 모습을 나타냈다.

우리 정부는 이 북한측 특사가 돌아간 뒤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전제 조건들과 2차 남북 정상회담 의제 등에 대한 입장을 김 모 통일부 과장을 통해 북한에 전달했다고 한 관계자는 말했다.

북한이 장관급인 노동당 비서급 인사를 파견한 반면 우리측은 실무자를 보낸 것과 관련, 정부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서로 격을 맞출 필요가 없을 정도로 대화가 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우리측 메신저인 통일부 실무자는 이 같은 극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난해 연말부터 일체의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는 등 극도의 보안을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실무자는 일본통으로 남북 관계 문제로 석사 학위를 받는 등 통일부 내에서도 대북 전문가로 평가 받고 있다. 한 정부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통일부 실무자를 대북 메신저로 삼게 된 데는 그가 언론에 공개된 인물이 아니어서 보안 유지에 효과적이라는 점이 고려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부는 북한이 김정일 위원장 답방 때 환영 인파가 300만 명 정도 돼야한다고 요구해 온 것(본지 12일자 섹션 ‘NK리포트’보도)과 관련, 일단 ‘수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정리하고 “김위원장이 극비리에 방한한 뒤 이를 전격 공개하면 환영 분위기를 더욱 조성할 수 있다”는 뜻을 북한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은 김 대통령이 평양에서 받은 환대만큼 김 위원장도 서울 답방 때 환대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한은 2차 정상회담 의제와 관련, 한반도 평화선언을 채택하는 데까지는 합의했다고 한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이 관계자는 “내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한반도 평화선언은 충격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현재 검토되거나 예상되고 있는 것은 김정일 위원장이 미국 부시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미사일과 함께 문제 삼고 있는 재래식 무기를 전격 감축한다고 선언하거나 휴전선 일대에 집중 배치되어 있는 인민군을 후방으로 돌린다고 선언하는 것 등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북한은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때 수행할 인사 명단도 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북한은 김 위원장이 상하이를 방문할 때 공식 수행한 당 정 군 핵심 인사 9명이 서울 답방 때도 수행할 것이라고 알려 온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들은 김영춘 군총참모장, 연형묵 국방위원 겸 자강도당 책임비서, 김국태 당 비서, 장하철 당 선전선동부장, 강석주 외무성 제 1부상, 김양건 당 국제부장, 현철해 박재경 군총정치국 부총국장 등이며, 박송봉 노동당 제1부부장은 지난 20일 사망했다.

서울 방문때는 북한의 형식상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과, 김정일 위원장의 신의주 현지 시찰할 때 수행했던 장성택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김히택 당 중앙위 제 1부부장 등도 합류할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일 답방 시기는 임 원장과 박재규 통일부장관이 최근 밝힌대로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답방 시기가 언제가 좋을 지 정부 내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당초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김정일이 봄에 답방한다고 말한 만큼 3월을 고집했고 관계 부처 당국자들은 이왕이면 국내 정치 일정, 특히 내년 대선에 유리한 시기가 아무래도 좋지 않겠느냐는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다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한과 한미 정상회담이 각각 2월27일과 3월7일로 잡히고 김정일이 4월 중순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자연히 김정일의 답방 시기가 순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정부는 한때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전격적으로 김정일 답방을 추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정부는 미국 부시 행정부가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정권이 과연 핵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하고 진심으로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지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다고 판단, 김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간 회담에 앞서 김정일 답방을 추진, 국내외에 남북한의 평화 의지를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 같은 제안의 효과 여부를 검토한 뒤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는 김정일 답방 전에 전력 지원 등 경제적 ‘선물’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자는 북한의 요구에 대해 ‘이 문제는 답방 이후에 다루자’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정부 관계자는 “정부는 북한에 현재 전력 50만kw 등 경제 지원을 당장 할 수 있는 여력도 없고 더군다나 여론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 위원장이 답방해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그 같은 지원이 가능하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이용할 교통 수단의 경우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 당국자들의 언급대로 그가 올 상반기 답방할 경우 김 위원장이 비행기를 싫어하는 만큼 자동차로 판문점을 경유, 서울에 올 가능성이 높다고 정부 관계자들은 전했다. 그러나 정부 일각에서는 기차를 이용하도록 하자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답방 시기가 남북한이 6·15 남북 공동선언의 1주년을 기념, 공동으로 치를 예정인 통일촉진기간(6월15일~8월15일) 중으로 잡힐 경우 올 9월 완공할 예정인 경의선 완공을 앞당겨 기차를 이용하도록 하자는 것이다./이교관 기자 haeda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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