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시곗바늘이 갑자기 한 50년 전쯤으로 돌아간 듯싶다. 이제 막 식민시대를 벗어나 신국가 형성의 문제에 직면한 국가들에서나 있음직한 논쟁이 수출로 밥을 먹고살고 세계의 IT 강국이라고 자처하는 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벌써 졸업했음직한 ‘자주(自主)냐 동맹이냐’ 하는 논쟁이 대학가도 아니고 정부의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다니, 국민들은 그저 아연하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현 시점에서 한국 외교의 비전을 자주외교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퇴행적일 뿐더러, 심지어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명분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주 그 자체가 부정적 의미를 갖거나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원론적으로 자주는 국가가 추구해야 할 가치의 일부이자 수단이어서 전혀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시대적, 현실적 맥락에서 국가의 외교정책으로 표방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지금처럼 고도로 상호의존적이며 세계화된 국제사회 속에서 자주를 부르짖는 국가는 국제적 적응이 극히 어려운 일부 제3세계국가들뿐이다. 자주는 그런 면에서 국제사회에서는 ‘폐쇄적 고립(孤立)’의 배타적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다. 한국이 이들과 같은 반열에 서서 그런 낡은 구호를 부르짖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동맹(同盟)도 물론 절대선(絶對善)은 아니다. 국가의 자존을 도와주는 유용한 전략적 방책일 따름이다. 동맹만이 유일한 대안이며 ‘동맹 없이 안보 없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우리의 위치, 역량, 비전을 생각해 볼 때 동맹을 대처할 만한 마땅한 대안이 없다. 이것이 분명해 보임에도 ‘자주’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 정부는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근본적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동북아경제중심국가, 2만달러 국민소득의 선진 경제국가를 말하지만 이를 어떻게 달성하겠다는 의지와 전략적 대안을 과연 가지고 있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다.

북핵문제를 풀고 안보를 굳건히 하면서 종국에 평화적 한반도 통일을 달성하고자 할 때 소위 자주적으로 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점이다.

소련의 위협이 사라진 지금에도 유럽과 미국 간의 지역동맹인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더욱 번성하고 일본이나 호주 같은 국가도 미국과의 양자(兩者)동맹을 더욱 돈독히 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이런 국가들이 자주적이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것인가.

심지어 남미국가들도 오랜 종속사관(從屬史觀)에서 벗어나 신자유주의로 선회하면서 다시 새로운 번영기에 진입하려 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주냐 아니냐가 아니라, 발전하느냐 몰락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우리의 역량과 처한 위치에 대해서도 제발 착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새로이 한 단계 더 발전하느냐, 아니면 그대로 주저앉느냐의 기로에 한국은 서 있다. 한국은 여전히 동북아에서 가장 약한 국가이며 북한의 짐까지를 짊어져야 하는 안보적으로도 취약하기 그지없는 나라다. 경제발전을 이뤘다고 하나 지난 천년의 역사에서 전 국민들의 의식주를 해결한 것이 고작 지난 20여년에 불과한 나라이다.

이것이 위기가 아니라면 정녕 그것은 우리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였음이다. 선진대국을 꿈꾸지 않는 국가는 세계에서 한 국가도 없다. 그러나 오로지 소수의 국가들만이 그 꿈을 이뤘다. 무엇보다도 제3세계적 멘탤리티에 빠진 국가가 선진대국에 오른 경우는 없다.

자주외교 논란은 한낱 해프닝 정도로 끝나기를 바란다. 국가를 그런 설익은 치기어리기까지 한 사고의 실험 대상에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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