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김정일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연초에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신사고’를 새로운 테제로 전 인민의 교화를 시작하면서 중국을 방문하여 ‘덩샤오핑(등소평) 개혁’의 상징이라 할 상하이의 푸둥(포동)지구에서 사흘을 보냈다. 이어서 김정일은 모스크바와 서울 방문을 계획하고 있다. 발빠르게 움직이는 김정일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짐작해 보기로 한다.

김정일이 구호로 내세운 ‘신사고’는 16년 전에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시작할 때 내세웠던 ‘노보에 미쉘리니(신사고)’와 닮았다. 낙후한 소련의 체제로는 자본주의와 대결할 수 없으므로 이념을 초월하여 자본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얻어 경제를 재건하자는 것이 그의 신사고였다. 고르바초프는 이 신사고를 바탕으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라는 혁명적 체제 개혁을 단행했으며 그 결과로 공산소련은 러시아로 다시 태어났다. 과연 김정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강대중국 건설을 먼저 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는 미제국주의자의 자본도, 일본군국주의자의 기술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실용주의 외교를 제창했다. 다만 사회주의를 고수하기 위하여 중국 공산당 1당 독재는 지속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일은 공산독재체제를 고수하는 중국식 개혁노선을 따르려 할 것이다.

문제는 개혁에 뒤따르는 위험 부담이다. 개혁·개방을 했을 때 쏟아져 들어 올 외래사상과 문화의 물결에서 1당 지배체제를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대만이라는 작은 적이 있었을 뿐이나, 북한에는 한국이라는 자기보다 몇 배로 강한 적이 있다. 김정일은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과감한 대남정책을 펴고 있다. 김정일은 한국을 일국양제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느슨한 고려 민주연방’의 틀 속에 묶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구상을 가지고 김정일은 앞으로 다음과 같은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김정일은 우선 서울을 방문하여 우리 정부와 ‘평화통일 선언’을 합의하려 할 것이다. 일단 이에 성공하면 적어도 선언적 차원에서는 통일을 이룬 것이 된다. 나아가서 이 선언에 따라 ‘통일헌법’을 함께 만들기로 하고 양측이 각각 자국의 헌법을 이에 맞도록 고치기로 한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이제는 남북문제는 ‘국내문제’가 되었으므로 개입하지 말라고 요구할 것이다.

다음으로 김정일은 러시아를 방문하여 중국·러시아·북한 간의 항미연대를 매듭지으려 할 것이다. 일단 이에 성공하면 있을지도 모르는 부시 미 행정부의 무력 응징을 억지할 수 있게 되므로 대미협상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다. 강화된 입지를 바탕으로 김정일은 미국과 평화협정, 수교, 주한미군문제 등을 놓고 본격적 협상을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김정일의 구상이 모두 성공적으로 전개된다면 북한은 안전과 발전의 기초를 확보하게 되고 북한 주도의 통일을 앞당기는 계기를 잡게된다.

김정일의 구상은 그대로 실현될까?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선 한국정부는 긴장완화에 도움이 되리라 여겨 김정일의 평화통일선언 제의를 반길 것이며 북한의 개혁·개방을 지원할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이념과 체제의 수호보다 통일에 더 큰 비중을 두는 한국 내의 진보 세력도 전폭적 지지를 보낼 것이고 자기당의 이익을 위하여 ‘개헌’에 뜻을 두고 있는 정치인들이 ‘평화통일을 위한 헌법 개정’에 동조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이라면 김정일의 평화 공세는 먹혀 들어가지 않겠는가? 걱정스럽다.

김정일의 신사고는 진정으로 민족화해와 평화를 지향했던 고르바초프의 신사고가 아니다. 북한의 신사고 선언에는 북한체제 민주화나 남반부 혁명포기 등은 전혀 들어 있지 않고 오히려 김정일 독재와 선군정치의 강화 등 시대역행의 구호만 들어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김정일의 위장 평화 행보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의 말보다 행동을 주의깊게 지켜보면서 냉철하게 대응해 나가야 한다.

( 서강대 정치학 교수 )

조선일보 2001년 1월30일자 시론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