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 시절의 백석.

정부가 월북 문인 해금 조치를 발표했을 때(1988년) 시인 백석은 정갈한 옛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는 애초에 북한이라는 "체제"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고향이 소월과 같은 평북 정주였고, 그는 귀향했을 뿐이었다. 고향이 그의 시심의 주요한 원천이면서 그곳 언어가 그의 시혼의 모태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념은 없었다. 식민시대를 방랑으로 보낸 그는 광복 후 지친 몸과 마음으로 고향에 깃들었으나 그것이 영원한 구속이 돼버렸다.

백석은 자비로 간행한 시집 "사슴"을 통해 1930년대 후반기 모더니즘 계열의 신인으로 단숨에 한국 문학사에 떠오른다. 한정판 출간인 탓에 문학지망생들에게 이 시집을 필사하는 것은 유행이었고, 윤동주도 이 필사본 시집을 간직했다. ‘사슴’은 당대 "가장 많이 필사된 시집"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소주)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밤 힌당나귀타고
산골로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산골로가 마가리에살쟈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것이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것이다
<백석. 1938년 3월 ‘女性’지에 발표>


그의 시는 향토적이고 서정적이었지만 모더니즘 풍의 세련된 언어감각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주착없는 향토주의"와는 구별되었다. "녹두빛 더블 양복에 검은 웨이브(물결 머리)를 날리면서 광화문을 지나는’ 백석의 풍모는 이국적이었다. 백석의 이같은 도회풍 감각과 재주는 조선일보에서 잡지 "녀성"(女性)을 편집할 때 발휘돼 연이어 매진되는 기록을 낳기도 했다.

백석은 1930~40년대를 거의 방랑으로 일관하면서 어둡고 긴 역사의 터널을 빠져 나오고자 했다. 그의 우울과 방랑벽은 체질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일제시대의 주눅들고 피폐해진 삶을 남도와 만주 등을 유랑하면서 이겨내고자 했고 그것을 빛나는 시적 감수성으로 포착해 낼 수 있었다.

몇 번의 결혼 실패와 잦은 이직, 그리고 만주 등지에서 소작인,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세관원 등으로 극도로 가난한 생계를 유지하던 방랑의 끝 지점에서 그는 광복을 맞았다. 34세였다. 그러나 오랜 방랑과 생활고로 그는 초로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내면의 피로함을 안고 그가 깃든 곳은 고향이었다. 아오야먀(靑山)학원 시절, 불어 영어 독어 러시아어 등에 뛰어나 동료 학생들로부터 스파이로 오해받을 정도였던 그는 잠시 고당 조만식의 통역 비서를 맡기도 했다.

백석의 시가 순수서정적이었던 때문인지 북한에서 시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 같다. 북한 정권 초기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고 하지만 북에서의 그의 삶은 분명하게 밝혀진 게 별로 없다. 문학사 속에서도 1948년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재북파 작가인 허준이 신천지에 발표한 몇 편의 시를 마지막으로 그의 흔적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시인으로서의 불우했던 삶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의 끈을 지속하고자 했던 흔적들을 남겨놓고 있다. 최근 알려진 백석의 행적은 1950년 전후 주로 번역가로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1949), 빠블렌코의 ‘행복’(1953), ‘이싸꼽프스키시초’(중국 길림성 연변교육출판사, 1954) 등이 그가 남긴 번역작품들이다.

그후 그는 동화작가로서 문학적 글쓰기를 지속시켜 나가고 한편으로는 "조선문학"지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감각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의 동화는 당시 박세영(북한애국가 작사자)이 극찬할 정도로 문장 감각과 우의(禹義)성이 빼어났다.

특히 ‘집게네 네 형제’는 당시 아동문학 불모지와 다름 없던 북한에 동물시리즈 동화 유행을 일으켰을 정도다. "조선문학"에 실린 시들은 내용은 체제 선전과 전후 복구 건설기에 필요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데 바쳐져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그가 30년대에 줄기차게 그려갔던 마을 공동체의 신화와 언어에 근거한 것이었다. "갓나물"(1959.6) "동식당"(1959.6) "축복"(1959.6), "눈"(1960.3), "전별"(1960.3) 등의 시가 그러하다.

이용악, 오장환 등 30년대에 같이 활동했던 시인들이 김일성 찬양과 체제 선전을 위해 생경한 구호를 사용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에 비해서 백석의 시는 서정성과 토속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시인으로서의 존귀함을 잃고 싶지 않았던 탓일까.

결벽증이 있었던 그의 습벽은 그의 시인으로서의 존재감에 깊은 그림자를 남겼고 그것이 북한 체제에서의 현실적 삶에서도 별로 굽혀들지 못했던 모양이다. 여타 장르에 비해 계급적 성향이나 이념적 성향이 희석될 수 있는 번역 작업과 동화 창작에 자신의 마지막 시혼을 불태웠던 것이다.

그는 그같은 내면의 고통을 “유년들의 세계는 주위 사물들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외어보는 세계이다. 유희에서 시작하여 유희에서 끝나는 세계이며 꿈에서 시작하여 꿈에서 끝나는 세계이다”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50년 중반 이후 김일성의 권력 투쟁이 강화되면서 이같은 백석의 시적 감각은 북한의 문예정책과 상충될 수밖에 없었고, 60년대 초에는 집필금지를 당하고 결국 숙청에 이르게 된다. 그의 사망시기는 52세 되던 1963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백석은 엄밀히 말하면 재북파 시인이었지만, 남한에서는 근 40년 동안 그의 작품은 빛을 보지 못했다. 북한에서도 그의 순수 서정성과 몰이념적 성향이 문제가 돼 숙청 사실조차 확인할 수 없는 무명의 존재가 되었다. 재북파 문인들의 이같은 운명은 이념인으로서의 자기 선언과는 관계없이 역사의 격랑이 어떻게 한 개인의 운명에 개입해 그 존재를 망각의 늪으로 빠트리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분단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적 장면이다.

/조영복 문학평론가 qbread@hananet.net


◈白石(1912-1963?) 누구인가

평북 정주 출생.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오산학교를 다녔고,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그 모와 아들’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다. 그해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아오야마(청산) 학원 영문과에 유학했다.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잡지 ‘여성’ 편집을 맡았으며, 시 ‘정주성’ 등을 발표했다.

1936년 33편의 시가 실린 시집 ‘사슴’을 자비로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면서 순수 서정시인으로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등으로 재직하다 만주로 가 방랑생활을 했으며 광복후 고향 정주로 돌아갔다가 북한 체제에 남게 됐다. 북한에서는 번역과 동화시 창작에 주력하다 숙청당한 뒤 1963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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