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운동권 간부 기고..."구국의 소리" 청취해 1월초 배포

지난 8일자 NK리포트 ‘북한 주민의 신년사 학습’ 기사를 보고 주사파 운동권 간부로 활동했던 한 독자가 원고를 보내 왔습니다. 필자의 요청에 따라 신원은 밝히지 않습니다. (편집자)

NK리포트는 신년사를 통째로 암기해야 하는 북한 주민의 고역을 전해주었지만, 더 고단한 것은 남한의 운동권 학생들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북한의 공동사설(예전의 신년사) 이외에도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 신년사까지 읽고 통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김일성 신년사를 처음 접한 것은 1990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선배가 투박하게 인쇄된 자료집을 읽고 있길래 슬쩍 훔쳐보니 ‘평가와 전망’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선배들이 읽는 책이면 닥치는 대로 따라 읽었던 학구열(?) 넘치는 초보운동권이었던 저는 학교앞 서점에서 그 책을 찾았습니다. 서점 주인이 이상한 눈빛으로 ‘없다’고 해서 다시 선배에게 물었더니 웃더군요. 그 선배는 노동당과 한민전, 김일성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선배와 다시 서점에 들렀을 때는 예의 자료집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진열장 뒤 비밀스런 공간에서 몰래 꺼내 주는 책을 받아들던 그 두근거림과 기쁨이란! 그것이 신년사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민민전 조직은 남한내에 있는 주사파 전위조직이라고들 했지만 사실은 북한내에 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황해남도 해주에 송신탑이 있어 ‘구국의 소리’ 방송을 내보내면 남한의 주사파운동권에서 받아적어 유포하게 됩니다. 운동권 내부에서도 민민전의 ‘구국의 소리’ 방송국이 남한에 있느냐 없느냐로 논쟁도 많았지만 결국 방송국은 북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민민전에서도 매년 따로 신년사를 발표합니다. 그래서 연말이면 주사파 운동권의 마음은 설렌답니다. 자. 올해 우리 당에서는 무슨 지침을 발표할까 하고요. 운동권 조직 중에는 구국의 소리 방송을 전문적으로 청취하여 이를 문건으로 만들어 배포하는 소집단이 있습니다. ‘벗’‘구국전선’‘불패의 소리’‘애국의 소리’‘등대’ 등의 제목으로 1월 2~3일 경엔 어김없이 배포됩니다.

김일성신년사와 민민전 신년사, 그밖에 민민전에서 발표한 1년 평가와 전망, 신년대담 등이 실려 있죠. 고학년들이 읽고 먼저 토론을 한 다음 점차 저학년들에게까지 토론이 이어집니다. 10여차례 토론회를 진행하다 보면 어느새 저절로 외워집니다. 다 외라는 강요는 없지만 신년사를 줄줄 외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분위기가 있다 보니 영웅심에서 통째로 외기도 합니다. 부끄럽지만 저 역시 김일성의 육성을 흉내내 가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 왼 적도 있습니다.

신년사에 나오는 독특한 문구는 그해의 유행어가 됩니다. ‘통일의 영마루’, ‘통일원년’, ‘신념의 강자’ 등이 그 예들이지요. 96년 이후 제가 그 세계에서 손을 씻는 바람에 올해 신년사는 4년만에 본 셈입니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더군요. 숨죽여가며 신년사 복사본을 배포하던 무시무시한 시절은 이제 박물관에 보관해야 될까 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내내 두 가지 마음이 엇갈렸습니다. 하나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죄스러움입니다. 이순옥이라는 탈북인의 수기에서 신년사를 외지 못해 정치범수용소에서 맞아죽은 사람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얼마나 죄책감에 몸부림 쳤는지 모릅니다. 또 하나는 지금 이 시간도 공동사설 학습을 열심히 하고 ‘김정일 동지의 위대함과 자애로움’에 감탄하고 있을 남한의 ‘일부’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제 이야기가 선량한 시민운동과 학생운동을 하는 분들께 누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아직도 미몽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바라며 저 역시 지난날의 잘못을 갚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이 글의 원문은 원고지 30장 분량으로 이메일클럽(www.emailclub.net)의 NK리포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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