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평양영화제에 참석해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둘러보는 외국 인사들.
내가 본 북한영화는 소재가 너무 제한되어 있었다. 표현 방법도 제한적이었다. 이것은 영화발전의 큰 걸림돌이었다. 우리 부부가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먼저 관심을 쏟은 것은 소재의 다영화,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숨통을 트는 일 등이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동유럽이나 중국에서 해외 촬영을 많이 하고, 국제영화제에 출품하고, 홍콩이나 일본의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영화를 만드는 등의 다각적 노력을 경주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피’를 수혈하려고 여러 가지로 애쓴 것이다. 내가 북한에서 만든 영화 ‘불가사리’는 민화에서 따온 소재를 일본 특수 촬영팀의 도움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일본 특촬팀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런 영화는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북한 영화계의 현실로 볼 때는 민화라는 새로운 영역의 소재와 외국의 기술력을 동시에 도입한 것이다.

이 영화를 제작할 무렵 마침 아웅산 테러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이 아주 좋지 못했다. 그래서 해외 영화인들이 북한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신변 안전의 문제도 있고, 자칫 북한측에 협력했다가 한국 진출의 길이 막히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급료를 2배로 지급하고 북한에 머무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신경을 쓰는 등 애를 많이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불가사리’의 줄거리는 이야기 자체로도 재미있고, 매우 상징적이다. 때는 고려 말. 딸 아미와 행복하게 살고 있던 으뜸가는 실력의 대장장이 닥세는 어느날 농민들로부터 빼앗은 가래와 낫 등의 농기구를 녹여 무기를 만들라는 독재자의 명령을 받는다. 명령을 거역한 그는 농민군에게 무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는다. 그는 옥에서 죽어가면서 밥알을 뭉쳐 작은 인형을 만든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당한 딸 아미가 어느 날 바느질을 하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바늘에 찔린다. 핏방울이 아버지가 만든 ‘밥알 인형’에 떨어지고 인형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불가사리’의 탄생이다. ‘불가사리’는 아미를 피붙이처럼 잘 따르며 쇠붙이를 먹고 무럭무럭 커 농민군들을 도와 독재자의 군대를 대파하는 데 앞장선다. 활을 쏴도, 대포를 쏴도 죽지 않는다. 그래서 ‘불가사리’이다.

전쟁은 끝나고 평화가 왔지만 ‘불가사리’의 식욕은 그치지 않는다. 마침내 농기구는 물론 가마솥 등의 생활용구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지경에 이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장장이의 딸 아미는 절에 있는 커다란 종속으로 들어간다. 배가 고파진 불가사리는 이 종을 먹어버린다. 종을 통채로 삼킨 불가사리는 갑자기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죽는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다. 이 작품을 보고 계급투쟁을 그린 작품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내가 의도한 것은 강대국들의 핵무기 경쟁에 대한 경고였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는 큰 기여를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오히려 평화로운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변해버린 괴물 ‘불가사리’의 한없는 식욕은 곧 ‘군비경쟁’을 상징한다.

이 작품을 본 서방측의 영화 관계자들은 “이제까지 노골적인 정치선전 영화밖에 없다고 생각해 온 북한 영화계에도 이런 작품이 존재하는가” 라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문제는 어떤 내용을 주체적으로 담느냐에 있는 것이지 해외에서 기술을 도입하고 자본을 받아들이는 것을 겁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발전을 위해서는 폐쇄성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해서 북한 사회에 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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