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평양 거리의 처녀들. 모두 스커트와 목도리를 착용하고 있고 나름대로 멋쟁이들이다.
◇사진설명: 평양 거리의 처녀들. 모두 스커트와 목도리를 착용하고 있고 나름대로 멋쟁이들이다.

'평양 처녀' 2000명 한지붕 생활
평양시 모란봉구역 월향동에는 '월향여성독신자합숙'이 있다. 나는 1984년부터 결혼한 94년까지 만 10년을 여기서 지냈다. 임진왜란 때 절개를 지켰다 하여 북한에서 논개만큼 유명한 기생 계월향의 이름을 딴 이곳에는 평양에 일자리를 갖고 있는 1500~2000명의 독신녀들이 한 지붕 아래 지낸다.

1, 2층은 상가건물로 빵집도 하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오빠의 약혼녀 덕분에 이 빵집에서 찹쌀떡, 딸기빵, 카스테라, 계란빵 등 잊을 수 없는 빵맛을 본 적이 있었지만 20대 중반부터 내 청춘의 가장 중요한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미녀배우·기자 등 각양각색
‘월향합숙’은 고등중학(남한의 중고교)을 갓 졸업한 10대부터 환갑을 넘은 노처녀까지, 공장노동자나 식당취사원으로 고된 일을 하는 여성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한 출판사나 방송국 기자들, 교원들, 교예단의 미녀배우들까지 각양각색의 미혼여성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이다. 북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숨은영웅따라 배우기'의 주인공인 생물학자 백설희, TV를 통해 얼굴이 잘 알려진 중앙방송의 오복숙 기자도 우리의 동숙자였다.

저녁은 면회온 총각들 북적
합숙생들의 평판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부모의 통제를 받지 않아 행실이 바르지 않다거나 합숙에서 식사나 세탁 등의 편의를 봐주기 때문에 살림살이를 못한다는 평이었다. "평양의 멋쟁이는 다 여기서 나온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용모를 꾸미는 데 열심인 것도 사실이다.

남자들은 합숙소 방에에 절대출입금지였다. 접수처에 직원이 근무를 서고, 밤에는 아예 합숙생들이 동원되어 야간근무를 서서 단속할 정도로 엄격했다. 그러나 저녁 퇴근무렵이면 합숙소 앞에는 처녀 만나러 온 총각들이 정문 앞마당을 꽉 메운다. 주말이나 명절이면 더 했다. 그 앞을 지나가자면 마치 인물검사라도 당하는 듯이 온몸이 오싹하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곤 했다.


3층부터 7층까지 한 층에 서른 여섯 개의 방이 있고, 10평 안팎의 한 방에 대여섯 명이 살았다. 이불장, 사물함, 신발장 등을 빼고 나면 생활 공간은 7평이 남을까 말까였다.

평양 안떠나려
노처녀 감수

여기서 얼마나 다양한 여성들의 삶이 부대꼈던가! 석재공장에 다녔던 고아처녀는 군관학교 학생과 연애를 했는데 남자가 지방에 배치를 받자 관계를 끊어버렸다. 월향합숙 여자들은 "전봇대와는 결혼해도 지방사람과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사코 평양살이를 고집하다가 평생을 혼자 늙어가는 처녀도 많았다.

제 물건에는 지나치게 예민해 비누 놓았던 각도가 약간만 달라져도 누가 썼냐고 추궁하는 처녀도 있었다. 지갑을 훔쳐 갔다고 내게 누명을 씌우며 달려들던 40대 여자와 일전을 치렀던 일도 기억이 새롭다. 결혼과 연애에 대한 관심으로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처녀들간에는 끝없이 악다구니와 승강이가 이어지곤 했다.

몇 번이나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신체검사, 안전부 주민등록 승인, 구역안전부, 분주소(파출소), 동사무소, 담당안전원, 합숙당비서…. 진저리나게 복잡한 절차 때문에 발을 떼기가 무서웠다. 주택난으로 우리 같은 독신자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집을 배정받기 어려웠다. 당국에서도 노처녀 문제로 골치가 아파 지방으로라도 시집을 가라고 대대적인 조치를 취한 적이 있었다.

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금지였다. 환경을 더럽힌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직장에서 생물동태(생태)라도 타 오면 관리원 눈을 피해 몰래 끓여먹곤 했다. 식당에서 밥을 타다가 방에서 끓는 국냄비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먹을 때면 그 재미가 특별했다.

티없이 맑았던 처녀들에 대한 기억도 있다. 나를 따랐던 한 처녀아이는 부모와 형제자매를 모두 잃고 합숙에 들어 왔었다. 나중에 결혼해 아이를 낳았지만 안타깝게도 절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몇년새 남루한 모습으로
94년 결혼으로 나도 합숙을 떠났다가 98년 평양을 떠나오기 전 작별인사를 위해 들렀다. 월향합숙은 내가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매 호실마다 고추장단지, 김치단지, 간장병 등이 늘려 있었고 깨끗했던 방벽은 석유곤로의 연기에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이불이 없어 포대기와 외투를 덮고 차가운 냉골을 견디는 처녀들. 물도 턱없이 부족하여 오물이 늘려 있었다. 독신여성들의 꿈과 현실이 부대끼며 삶의 씨줄날줄이 짜여갔던 월향합숙은 내가 떠난 몇년새 남루한 얼굴로 흔들리고 있었다. 떠나는 나를 붙잡고 통강냉이 한끼 식사라도 타먹일려고 애쓰는 동료를 만류하며 서둘러 그곳을 빠져 나왔다.

"언니. 정말 가긴 가니?"

그 정황이면 대체로 눈물콧물 흘리며 이별소동일텐데 누구도 그런 기색이 없었다.

(최진이 chlwlsdl@yahoo.co.kr ) (전 조선작가동맹 시인ㆍ99년 11월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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